밤을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건 공기의 낌새로 먼저 알았다. 은근하고 끈질기게 창문 틈 사이로 파고드는 냄새가 있었다. 폐허와 공허의 기척.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하게 되는 냄새였다. 드라마를 틀어 놓고 스트레칭을 하다 창문 밖을 내다본 순간, 공중을 떠돌던 무거운 연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순식간이었다. 망연히 벤치에 앉아 있다 콧잔등에 떨어진 빗방울에 화들짝 놀란 것처럼, 선명한 실체.
누군가 먼 데 있는 사람한테 소리치는 소리, 바삐 뛰다 멀어지며 잦아드는 발자국 소리,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 몇 대의 차가 도착해 멈추는 소리가 이어졌다. 밤의 고요를 깨는 그림자들이 요란하지 않게 분주했다. 볼륨을 한껏 낮춘 화면에서 재생되는 장면처럼.
긴 잠에서 깨어난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뜻밖의 전개를 알리는 알람 같기도, 타인의 벨소리 같기도 한 낯설고 규칙적인 소리. 소리는 모두를 깨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끈질겼다. 희미하던 음이 점점 커져 집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경고의 소리로 바뀌었다.
줄기찬 그 소리를 듣고 밖에 나온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 한 명뿐이었다. 화재경보기는 저층에 먼저 들리게 설계됐는데, 그 시간에 깨어 있어 소리를 들은 게 그와 나뿐이었던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서로에게 처음 보는 얼굴이었던 우리는 피차 모르는 사람인 걸 확인하자마자 이내 연기와 냄새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고, 아파트 단지 주변을 감싸듯 멈춰 선 소방차와 구급차에 이르러 시선을 멈췄다.
불이 시작된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입구에는 질서 있게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가 옹색하게 뭉쳐 있었다. 꾸준히 짙어져 검은 밤을 닮은 덩어리가 된 연기였다. 연기의 밀도와 농도를 확인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집까지 돌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의 순서를 정했다. 우선 같은 단지에 사는 친구들을 깨워 대피시키고, 잠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을까. 아니, 옷이 문제가 아니라 뭔가 챙겨야 할까. 챙기는 것보다 일단 집에서 나오는 게 먼저일까. 그런데 나한테 귀중품은 뭘까.
결국 나는 폰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왔다. 잠깐 사이 횡단보도 맞은편 편의점 앞에는 자고 있는 가족을 깨워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자다 깬 어른들은 지친 표정이었고, 아이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몰라 우유나 젤리나 컵라면 따위를 사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 걸 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사람마다 재난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니까 별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뭔가 먹거나 마셔야 상황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이 생기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앉을 의자가 부족해 선 사람들은 불의 원인과 정도에 대해, 사람과 차의 무사에 대해 얘기했다. 고요하던 거리가 사람과 차로 북적이자 이상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연달아 소방차가 도착했고, 아홉 대까지 세고 나서 세기를 포기했다.
그런 혼란과 연기와 컵라면과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떤 번호를 계속 생각했다. 얼마 전 헤어진 사람의 번호였다. 헤어졌어도 이런 상황이면 그가 올 지 모른다. 온다면, 폰만 들고 길에 서 있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될까.
다음은 그려지지 않았다. 감정과 상관없는 문제로 화해한다면, 화해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더 곤란한 경우는 전화를 했는데 그가 자느라 못 받거나 받았어도 나한테 오지 않는 경우였다. 안 올 사람은 아니다, 도리질을 하다가도 상상하기 싫은 현실을 마주하는 게 얼마나 두려운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당장 버튼을 눌러야 할 것 같기도 했고, 절대 눌러선 안될 것 같기도 했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추운 것도, 폰의 배터리가 얼마 안 남은 것도 잊었다.
기자가 왔다. 모여 있는 사람들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인명 피해 없이 차 몇 대가 전소했다는 소식을 들려주고 떠났다. 아홉 대가 넘는 소방차와 그만큼의 소방대원들이 왔어도 아침까지 진화 작업은 계속됐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들어 있던 건물을 바라보는 사람 중에 졸린 표정을 한 사람은 없었다. 밝아 오는 아침 해 아래, 가족한테만 보이던 민낯을 드러낸 일에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가진 것이 사라질 위기 앞에서는 누구나 가진 것을 돌아보게 된다. 가지고 나온 게 없어 홀가분했지만 그래서 더 추운 기분이었다. 소매를 끌어당겨 식은 손등을 덮었다. 미동 없는 자세로 속에서 부는 태풍을 견뎠다. 상심도 낙담도 감춘 태연한 표정으로 열한 개의 숫자를 계속 생각했다. 생각하다 보니 연락을 하느냐 마느냐가 내가 가진 것의 상실과 보존을 가르는 문제로 느껴졌다.
고민과 현실 세계를 오가느라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진화가 마무리 단계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차를 내고 쉴까 지금이라도 출근할까 고민하던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오늘의 무사를 간신히 허락받은 사람처럼 기운 빠진 얼굴로 횡단보도를 건너며 생각했다.
이제, 그 사람한테 연락할 이유가 없다.
내가 디딘 자리까지 불길이 치솟아도, 오늘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해도 연락할 수 없는 사이. 그가 없는 날들이 비로소 시작됐다는 선언, 완전하고 무결한 작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