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뭐가 걸린 줄 알았는데 마음에 걸린 거였어요
안녕.
안녕이라는 말은 특별하죠. 발음하는 순간, 안녕 말고는 다른 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안녕 하나를 위한 모든 게 동시에 떠오르기도 해요. 지금 이 순간도 그대가 안녕한지 걱정하느라 원래 쓰려던 말이 다 흩어질 정도거든요.
안녕인가요, 우리 오늘은.
안녕한가요, 우리 없이도.
그날, 아홉 시에 잘 거라고 큰소리쳐놓고 새벽 세 시 반에 잠들었어요. 알람을 맞춰 놓은 네 시에 깼고요. 삼십 분 자고 일어난 찌뿌둥한 몸과 삐거덕거리는 팔다리로 달릴 수 있을까, 고민하기엔 첫차 시간이 빠듯했어요. 고민은 가면서 하기로 하고 차를 타러 뛰어갔죠. 차에서도 잠이 안 왔어요. 기운을 북돋아 주는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보는데, 새벽 거리를 달리는 조용하고 바쁜 차들이 모두 뛰는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반가울 줄 알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대회가 취소되길 바란 적 없었거든요. 그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뛰긴 뛰어야 할 텐데, 약속한 날이 훗날로 유보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가만히 꾸준하던 비가 주춤하다 그쳤어요. 안심하고 날아간 축포에 카운트다운을 하는 무리가 들떴고, 응원 부대는 열렬히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어요. 살다 보면 언제 뛰어야 할지 모를 때가 종종 있죠. 스타트 라인이나, 출발 신호나, 운동화 끈을 묶어야 하는 시점을 놓치고 망연히 멀어지는 등만 바라볼 때가. 달리기 대회의 좋은 점은 그거였어요, 뛰어야 할 때를 정확히 말해 준다는 점.
열몇 시간 굶고 삼십 분 누웠다 일어난 몸이 3, 2, 1... 다음 0에 가까운 쪽으로 튀어 나갔어요. 누군가 힘껏 분 민들레 홀씨처럼, 나풀거리며 출발선에서 멀어졌어요. 제 몸인데도, 제 몸이 아닌 것 같았죠. 흐리고 낮은 하늘이었어요. 차바퀴만 닿았던 길을 발로 밟는 느낌을 기억하려 애쓰며 도시의 대로와 다리와 빌딩 사이를 통과했어요. 호흡만 응시했어요. 쓰러지지 않을 속도인가. 출발지로 다시 돌아올 만한 힘인가.
벤치 있는 길을 달릴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자꾸 앉고 싶었거든요. 거기 동네 주민처럼 앉아서,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있으면 아무도 틀린 그림을 못 찾을 것 같았거든요. 거길 벗어나려고... 지금은 너무 일러, 라고 끊임없이 되뇌었어요.
저처럼 벤치를 힐끗거리는 선수는 없었지만 넘어지거나 다치는 선수들은 있었어요. 응급 처치 대원이 뛰어오고, 피를 흘리며 코스 밖으로 나가는 종아리를 보며, 다른 사람의 열의는 까맣게 모른 채 벤치를 기웃거린 걸 후회했어요.
달리기를 못 하고, 싫어해요. 학창 시절 제일 멀리한 게 달리기였어요. 다른 과목은 싫어한 적 없는데, 달리기만 하면 목에서 피맛이 나고 심장이 아픈 게... 너는 뛰어선 안 되는 몸이야, 말하는 것 같았어요. 오래 달리기건 단거리건 종목 상관없이 못 하니 뛰는 시간이 고역이었고 어떤 핑계로든 피하고 싶었죠, 그 시간을.
그렇게 꺼리던 달리기를 왜 시작했냐고 물으신다면, 그때 제 곁에 두 명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한 친구가 어느 날 같이 뛰자고 했고, 다른 한 명은 같이 달리기 대회에 나가자고 했죠. 부드럽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소중한 사람들이었어요. 하고 싶지 않고 못 하는 데다, 평생 할 생각이 없던 것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사람들.
그때부터 뛰기 시작했어요. 일주일을 매일같이 뛰다 보니 시간과 시선만 의식하지 않으면 저도 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오십 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됐을 때, 그때가 절정이었을 거예요. 심장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점에 도착했다는 점에서.
친구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어요. 내 걱정은 말고 쌩 하니 가 줘, 그래야 나도 편하게 뛰어. 신신당부했던 터라 서운하지 않고 안심이 됐어요. 친구가 목표를 달성하면 전 실패하더라도 괜찮았어요. 대회에 참가한 게,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나이 들면 내가 너 먹여 살릴게.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 친구예요. 그 문장에서 기쁜 부분은 먹여 살리겠단 부분이 아니라 그 말이 향하고 있는 먼 미래죠. 마음도 상황도 사는 곳도 다 달라질 그때, 저조차 저를 확신할 수 없는 때에 확신의 씨앗을 심어 주는 어조가 거기 있어요. 친구는 늘 친구의 미래에 제가 있다고 했고, 한 번도 그걸 의심하게 하지 않았어요. 그 확신으로 많은 날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늙은 다음에도 곁에 있을 한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으니까요.
나도 돈 벌 거야.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언제나, 알 수 없는 미래의 가장 명랑한 부분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네 곁엔 내가 있을 거야, 그러니 너도 내 곁에, 그런 말 없이도.
차량 통제를 해서 하늘과 한강 말고 아무것도 없는 서강대교 위를 달리면서 날개처럼 펼쳐진 강의 양쪽을 바라봤어요. 가슴에서 둥둥 울리던 음악이 지워지고 허, 하, 허, 일정하게 반복되는 숨소리만 남은 길. 이제 막 출발한 아침만 있어서 모든 걸 잊을 밤까지는 멀고 먼 길. 사방으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 위에서, 물 위를 내 다리로 뛰고 있다는 자각 없이 반환점에 가까워지고 있단 것만 생각했어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얼굴을 낱낱이 살폈어요, 아는 얼굴을 찾으려고. 몇 백 개의 얼굴을 스쳐도 얼굴 하나가 없어서, 이미 놓친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저만 아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친구가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갓 캔 고구마처럼 붉어진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제가 친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장면이 찍혔어요, 찰칵.
다리에서 예뻤어, 친구가 말하며 보여준 사진 속 저는 헝클어진 머리에 쭈글쭈글한 야구 모자를 쓴 채, 활짝 벌어진 봉투처럼 무방비 상태로 웃고 있었어요. 예뻤어,의 목적어가 제가 아니라 뒷배경인 하늘인 게 분명했죠.
내가 친구를 이렇게나 좋아하는구나, 싶은 표정이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이런 표정을 만드는 게 너야, 싶게 켜진 표정이었어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만 켜지는 표정.
한 번 그렇게 켜지고 나니까, 친구가 떠난 뒤에도 수시로 밝아질 준비가 됐어요. 힘들 땐 숨을 고르며 걷다가, 급수대가 나오면 이온 음료를 네 컵씩 마셨어요. 음료가 바닥에 깔리게 살짝 담겨 있어서 네 컵은 마셔야 한 컵 마신 느낌이었거든요. 상관없었어요, 속에서 물이 출렁이건 말건, 출렁여서 물 위에서 뛰는 느낌이건 말건.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게 그때쯤 제 목표가 됐으니까요. 꽤 늦은 목표 설정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장담 못 할 결과였어요.
7킬로쯤 뛰자 포기할 수 없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온 음료를 뿌리 끝까지 빨아들인 덕분인지, 비슷한 속도로 다리를 끌면서도 계속 전진하는 등을 진득하게 바라본 덕분인지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어요. 희미하게나마 팔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집중했어요.
여자 친구나 아내를 응원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있었죠. 친구가, 왜 저렇게 다들 안아 주고 잘 뛰고 오라고 난리야? 했을 때 난 못 봤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어? 받아치긴 했지만 보긴 봤어요, 그런 사람들. 저는 정말로 하나도 부럽지 않았어요. 올 거라 기대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누군가 왔다면, 안아 주면서 잘 뛰고 오라고 말해줬으면 괜히 기록 경신할 때까지 죽어라 뛸 뻔했으니까, 아무도 안 온 게 다행이었죠.
멀리 결승선 기둥이 보였어요. 마지막 한 걸음은 남은 힘을 다 끌어모아 힘차게 내디뎠고, 끝냈다는 안도감에 팔을 쭉 뻗었어요. 만세를 하듯이. 만세 하는 팔 뒤로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한참 전에 들어와 절 기다린 친구가 있었어요. 앉아서 쉬고 싶은 다리를 땅에 단단히 붙이고 서서, 뒤늦게 들어온 고구마 하나를 안아 주려고 기다린 얼굴이.
그렇게 완주했어요. 죽을힘을 다해 뛰거나 뛰면서 울지는 않았지만, 자거나 먹지 않아도 10킬로는 뛸 힘이 제 안에 있단 걸 알았어요. 친구와 함께 간 다른 세계들처럼, 두렵고 힘들던 시작이 결국 세계의 둘레를 넓히는 결과로 돌아왔어요.
컨디션이 좋으면 하프 마라톤에 도전할 지도 몰라요. 그때 은근한 목소리로 그대한테 말을 걸 지도 모르죠.
10킬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응원해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한 사람은 내가 될게요. 탁, 탁, 땅을 밀어내며 떠오르는 서로의 발자국 소리가 아니어도, 만날 수 없는 데서 그대가 뛰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힘을 내고 힘을 얻어서, 그 힘에 제 힘을 보태 그쪽으로 보낼게요. 주고받는 힘이, 무지개 양끝처럼 우리가 연결된 하나란 걸 보여줄 거예요. 그때쯤엔 아무도, 아무것도 우리를 멈추게 하지 못할 거예요. 해냈다는 기쁨 말고는, 끝까지 혼자 왔다는 성취감 말고는 무엇도.
메달은 그대 거예요. 다음 주자를 위한 오늘의 바통이죠. 오늘만 갖고 있다 목에 걸어 줄게요. 어디선가 뛰기 시작해서, 이쪽으로 뛰어오는 중인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