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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데이지 Feb 03. 2020

한 장 소설2: 이별하는 법

이별만큼 사람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 없다. 떠나는 사람은 매달린다고 잡히지 않고, 서로 사랑하더라도 언젠간 의지와 관계없이 헤어지기 마련이니까. 이별의 시기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인의 작은 섭섭함이 증오로 발전하기 전에, 아버지의 암세포가 온몸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A는 친구 H로부터 아버지의 부고 문자를 받고 한참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앉아있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몇 주전만 해도 연말 홈파티에서 폭립을 오븐에서 꺼내며 환호성을 지르고 감바스에 통마늘 한 통을 부어넣고 웃던 갈릭녀. 그녀가 하루아침에 맞이했을 지옥을 A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옷장 깊숙이 손을 넣어 검은색을 꺼내며, 또 지하철 봉에 몸을 기대고 서서 최대한 그 지옥을 상상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버릇처럼 인스타그램을 열어 인친들의 스토리를 확인했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 앙증맞은 새끼 코기 엉덩이. 헬스장 셀피. 모든 것이 삶을 축하하고 있었다. A는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껴 다시 H와 공감하고자 정신을 수련했다. 세찬 강물에 빠져 붙잡을 걸 찾는 마냥 허우적댈 뿐이었다.


앞에 앉은 두 명의 중년 여성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시끌벅적한 대화는 창문 밖으로 몇 개의 역이 지나가도록 계속됐다. 양재. 매봉. 도곡. 대치. 대청역에 가서야 끝이 났는데, 한 명이 문이 닫히기 직전에 일어나 황급히 내린 것이었다. 남겨진 한 명의 표정이 단 번에 굳었다. 그녀는 본래 혼자였던 것처럼 무표정으로 남은 여정을 이어갔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엄마랑 달려왔는데, 십오 분 늦었어. 우리가 세시 십오 분에 도착했는데, 아빠는 세시에 떠난 거야. 아빠의 손이 아직 따뜻하더라고.

식당에서 H가 말했다. 원래 큰 고양이 눈이 퉁퉁 부어 작은 얼굴을 꽉 채웠다. 검은색 한복 탓인지 더 야위어 보였다. A는 장례식에 오면 H의 손을 붙잡고 엉엉 울거라 상상했는데,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H는 실감이 안 난다며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A는 동그랑땡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오빠랑은 어떻게 됐어?

H가 오징어를 입에 물고 물었다. 둘이서 폭립에 와인 한 잔 했을 때, H는 A에게 오빠의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 몇 가지를 전수해주었다.

이런 남자는 진지하게 말고, 편하게 해야 해. 장난도 치고. 그리고 뭐 하는 거야.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지. 적극적인 여자 싫어하는 남자 없더라.   

 A는 적극적으로 다가가다가 마음이 없어진 그 오빠보다도 A에게 다가온 새로운 남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마음이 들뜨고 목소리가 커질게 분명했기 때문에, 애써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냥 친구로 지낼 거 같아.

정적이 찾아오자 H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직 실감이 안 나. 울다가 웃다가 해.
한참 그러겠지?

H가 끄덕였다. A는 경험해 본 사람처럼 말한 자신이 이상했다. A가 겪은 가장 긴 이별은 8개월짜리. 첫 남자 친구와의 이별이었는데. 그 슬픔의 깊이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는 면에서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H는 다음 달부터 새 작품 공연을 시작한다고 했고, A는 축하다면서 맡은 역할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설명하는 H를 보며 계속해서 새롭고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랐다. 슬픔, 죄책감 같은 이별의 끈을 잡으려 허우적대지 않고, 새찬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갈 수 있기를.


H의 남자 친구가 도착했을 때, A는 가봐야겠다며 일어났다. 이제 H가 지하철의 중년 여성처럼 혼자 무표정으로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다. A가 편의점에서 사 온 크런키 초콜릿을 건네자 H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딱 필요했던 거네. 나중에 놀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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