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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데이지 Jan 31. 2019

예쁜 얼굴 아래 드리운 그림자

내면을 비추는 거울, 소설


Take a Step 카페에서 밀크티 한 잔에 읽은 "마담 보바리"


샤를르 보바리의 새신부 엠마는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세련된 스타일로 집안을 장식하고, 남편의 옷을 골라준다. 퇴근시간에 맞춰 진수성찬을 준비하고 요리마다 근사한 이름을 붙여 남편으로 즐거이 그릇을 깨끗이 비우도록 한다. 가끔 오는 손님들은 그녀의 요리 솜씨에 감탄한다. 야망이 없는 선한 시골 의사인 샤를르는 힘든 하루 끝에 그녀를 보는 것으로 행복해한다.


결혼 생활에 만족하는 샤를르와 달리, 엠마의 로맨스에 대한 큰 기대는 결혼 생활 속에서 무너진다. 샤를르는 문학과 예술엔 관심이 없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과 하녀에게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며 몸도 망가진다. 샤를르는 그녀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문학을 좋아하는 약사의 조수 레옹과 사랑에 빠진다.

레옹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마을을 떠나게 되고, 실망한 엠마에게 자유분방한 청년 로돌프가 접근한다. 엠마는 그의 감언이설에 푹 빠져버리고 그들의 밀회는 4년간 지속된다. 엠마는 로돌프에게 자신을 이 따분한 삶에서 구원해 달라며 애걸한다. 둘이 함께 떠나기로 한 날, 로돌프는 편지만을 남기고 그녀를 떠난다. 엠마는 심한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독약을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엠마를 보며 안나 캐러리나가 생각났다. 그녀 역시 정약 결혼을 하고, 그녀에게 반한 젊은 청년을 사랑하게 되어 가정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뜨겁던 마음이 식는 걸 보자, 죄책감과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달리는 기차 앞에 뛰어든다.   


고전 소설 속 아름답고 낭만적인 여성 인물들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한다. 그들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 것에 대한 벌을 받는다. 왜 그래야 하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결말이 가혹하다고 느낀 이유는 아마 내가 소설이 쓰인 시대와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소설이나 영화에선 여성이 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 전 애인을 떠나 행복하게 산다. 현대는 그런 여성을 대놓고 욕하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적어도 유럽, 미국, 한국 등에서는) "마담 보바리"는 1856년 프랑스, "행복"과 "안나 케러리나"는 각각 1859년, 1878년 러시아에서 모두 남자 작가에 의해 쓰였다. 작가인 구스타브 플로베르와 리오 톨스토이는 모두 성적으로 개방적인 삶을 산 남성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두 작가는 작품 속 여성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연민을 느낀다.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인물의 복잡한 내면에 빠져들어 어느 순간 동조되어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성들에게 가혹한 결말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그 당시 여성들의 욕망은 더 강하게 억압받았을 것이다.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가 "공중도덕 및 종교적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기소당했으니까 당시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 종교적 규율이 엄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엠마를 향한 시선은 더 이상 따갑지 않다. "마담 보바리"가 '사실주의 소설의 시작'으로 불리지만 극단적인 결말은 개연성을 잃었다. 하지만, 엠마의 내면에서 발견된 욕망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부조리는 우리의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엉뚱한 남자에게 자신을 이 불행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엠마의 애원은 숲 속에 버려진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처럼 서글프고 고독하며, 의지할 곳을 찾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불행은 전부 나의 부족함 탓이란 말인가? 내겐 아무 소망도 없는 것인가? 밝지만은 않은 우리의 고뇌를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담은  "마담 보바리"는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서 지금까지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At the bottom of her heart, however, she was waiting for something to happen. Like shipwrecked sailors, she turned despairing eyes upon the solitude of her life, seeking afar off some white sail in the mists of the horizon. She did not know what this chance would be, what wind would bring it her, towards what shore it would drive her, if it would be a shallop or a three-decker, laden with anguish or full of bliss to the portholes. But each morning, as she awoke, she hoped it would come that day; she listened to every sound, sprang up with a start, wondered that it did not come; then at sunset, always more saddened, she longed for the morrow.”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돌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난당한 선원처럼 그녀의 삶의 고독 위로 절망한 눈길을 던지면서 멀리 수평선의 안갯속에서 혹시 어떤 흰 돛단배가 나타나지 않는지 찾고 있었다. 그 우연이, 그녀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떤 기슭으로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인지, 그것이 쪽배 일지 삼층 갚판의 대형선 일지, 고뇌를 싣고 있는지 아니면 뱃전까지 가득한 행복을 적재하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바로 그날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기도 했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놀라곤 했다. 그러다가 해가 지면 언제나 더한층 마음이 슬퍼져서 어서 내일이 오기를 바랐다.

마담 보바리, 구스타브 플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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