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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속삭일 뿐이다

by 채 수창

'오늘 겨우 해를 볼 수 있네. 이번 추석에는 무슨 장마처럼 비가 오냐?'

'그러게. 나가지도 못하고 책상 앞에만 붙어 있었어.'

'그래도 오랫만에 가족들 만나니까 좋더라. 이 사진 좀 볼래?'

'아, 너는 집이 아래 지방이라 멀리 갔다 왔겠네. 무슨 사진인데?'

'우리 가족이 오랫만에 모였는데, 100세 다 되신 할머니가 이렇게 웃으신 게 요근래 처음이라네. 이 사람이 큰형 조카고...그리고 저 사진 속 벽에 걸린 상장들이...'


그렇게 구구절절, 오랜 시간 동안 사진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사진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야?'

바로 이겁니다. 사진이 스스로 말하지 못하면 그 사진은 실패한 사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서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을 착각합니다. 마치 소설처럼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명확한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사진 밑에 긴 캡션을 달고, 전시장에서는 작가 노트나 사진마다 설명문을 붙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진의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문학에서 하는 스토리텔링입니다.


사진의 스토리텔링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관람자들에게 이야기를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긴가가 관람자에게 100을 보여주면, 관람자들은 100만 받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30만 보여주면, 관람자들은 각자의 경험과 생각으로 나머지 70을 채우면서 100 이상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진가와 관람자 모두의 100 이상이 되는 것이죠.


스토리텔링이 좋은 사진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요소 하나로 전체를 지배합니다. 제 사진 몇 장을 가지고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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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는 요소는, 오른쪽 아래 어둠속에 잠겨 있다가 빛을 살짝 받은 의자 등받이의 일부입니다. 만약 이 의자 부분이 없었다면, 이 사진은 단순하게 기하학적 요소나 추상 이미지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요소가 개입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의자는 인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가장 직접적인 사물입니다. 의자 하나가 비인격적이던 공간에 '누군가 여기에 있었다' 또는 '누군가 여기에 앉을 것이다'라는 인간적인 차원을 부여합니다.


이 의자는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앉아 있었는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왜 지금은 비어 있는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스토리텔링의 시작입니다. 어둠은 더 이상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일어났거나 일어날 무대로 변모합니다. 빛을 받은 의자의 따듯한 색감과 부드러운 곡선은 프레임 상단의 차갑고 직선적인 빛과 대조를 이루면서 외로움, 고독, 그리움과 같은 감정을 이끌어냅니다. 관람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면서 이 빈자리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완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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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깨끗한 흰 벽, 모서리가 만드는 부드러운 공간 분할, 그리고 프레임 왼쪽에 부분적으로 보이는 식물의 싱그러움이 평화롭고 안정된 실내 풍경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 고요함을 깨고 사진에 생명력과 이야기를 불어 넣는 푼크툼은 바로 '벽 한가운데 붙어 있는 작은 나무 스위치입니다.


스위치는 인간의 손길이 가장 빈번하게 닿는 사물입니다. 그 존재는 '이 공간에 사람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따듯한 흔적입니다. 나무라는 재질감은 차가운 벽에 아날로그적인 온기를 더하며, 이 공간이 단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와 삶이 있는 곳임을 말합니다.


스위치는 '켬'과 '끔', 즉 빛과 어둠, 활동과 휴식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작은 장치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일상적 행위들을 암시하며 정적인 사진에 시간의 흐름과 잠재된 동력을 부여합니다. 식물의 싱그러운 생명력과 스위치가 암시하는 인간의 존재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 있는 공간의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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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강렬한 사선 구도와 빛의 극적인 활용을 통해서, 방치된 공간에 남겨진 흔적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건물 벽을 가로지르는 빛의 사선은 강한 긴장감과 역동성을 만들고, 건물의 기하학적 형태를 강조합니다. 관람자들은 이 사진을 보면서 강렬한 조형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진의 서사를 완성하는 것은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의자'들입니다. 배경을 이루는 건물과 빛의 경계는 매우 날카롭고 기하학적인 질서를 보여줍니다. 대조적으로 의자들은 쓰러지고 엉켜서 무질서와 혼돈을 보여줍니다. 이 극명한 대비가 사진의 핵심적인 갈등이면서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의자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영업이 끝난 카페의 모습일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자리를 피한 흔적일 수도 있으며, 혹은 오랫동안 버려저 방치된 공간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넘어진 의자들은 그곳을 스쳐 지나간 시간과 사건을 묵묵히 보여줍니다.


프레임 전체를 지배하는 검은색에 대조되는 하얀색의 가느다란 의자 프레임들은, 마치 앙상한 뼈나 폐허의 잔해처럼 보입니다.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부분과 검은색 의자 프레임이 교차하면서 파편화된 이미지를 더욱 강조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사라져버린 활기의 기억, 시간의 퇴적물이라는 은유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세 장의 사진 모두에서 보시듯이, 사진의 힘은 종종 가장 작고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에서 나옵니다. 그 디테일이 관람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건드릴 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한 편의 시나 소설처럼 스토리텔링을 갖게 됩니다.


기억하세요. 좋은 사진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집니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합니다.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상상하게 합니다. 사진가가 내 사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싶어질 때는 사진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다시 자신에게 물어 보세요.


'무엇을 더 뺄 수 있을까?'


사진은 더하기의 예술이 아니라 빼기의 예술입니다. 더 적게 보여주세요. 그리고 관람자들이 채워 넣게 하세요. 그들은 우리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지혜롭고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를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의 마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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