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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ratives Dec 28. 2019

모두와 헤어지며 사랑을 할 거야

김민정 -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변명]

누구나 타인에게 난감한 부탁을 받는 순간이 있지만, 무언가를 만들거나 그걸 소개하는 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고정적으로 그런 부탁을 떠안는 시기가 있습니다. 연말 ‘올해의 XX’을 골라달라는 말이 그래요. 안테나의 색적 범위가 아무리 넓어도 애초에 만들어진 모든 것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올해의 책’이라는 표현보다 '내가 올해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이 보다 정확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죠. 부탁을 받는 시간과 경험, 생각이 어지럽게 내면에 쌓일수록, 무엇이 좋고 나쁘며 그 이유를 불특정 다수에게 제시하는 일에 수반하는 책임감의 무게를 실감해요. 모르는 것이 보다 많던, 표출하는 자의식은 비대하지만 형편없는 안목을 지님에서 나오는 뻔뻔함이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면 일언반구도 없이 부탁을 처리했겠지만, 지금의 저는 모름을 어렴풋이 아는, 앎과 무지의 순환에 빠진 겁쟁이가 되었기에 이런 변명으로 출발합니다.


‘올해의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다양해요. 정말 귀찮으면 판매량을 기준으로 할 수 있고, 후보군을 정해 권위는 본인들이 부여하되, 독자 투표로 책임을 떠넘겨 '이게 무슨 올해의 책이냐. 얼마 받았냐'와 같은 질문을 회피하거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막연하고 강렬하게 마음에 남았다는 것만으로 '이 책 정말 좋았어, 나 믿지?'로 얼버무릴 수도 있죠. 이런 행위들의 동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걸 읽었으면 좋겠어'라는 향유의 맥락과, '우리가 좋은 책을 골라줬으니 우리의 오프라인 공간 혹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책을 구매해줘' 같은 상업적 접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돌고 돌아 '올해의 책'을 향한 공통된 시선은 '이건 좋은 책'이라는 판단입니다.  그 시선을 끝까지 끌고 나가려면 좋은 책, 더 나아가 제가 좋아하는 말과 이미지의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 제시해야 하죠.


계속 변명하면, 좋은 책의 조건은 주관적입니다. 사회화 과정에서 어떤 가치관에 노출되었고 무엇을 경험했느냐에 따라 답은 다르겠죠. 그것에 납득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분명 나올 텐데, 제 생각에 좋은 책은 세종도서나 온오프라인 서점, 출판사, 인플루언서, 기관의 권위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좋은 책이라 생각하는 이유와 책이 가진 서사 자체가 단단함을 관철했을 때 그것으로 규정될 수 있어요. 그렇게 되어야만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때가 오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좋은 책, 달리 말하면 고전으로 남을 수 있죠.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저는 김민정 시인의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가 어째서 좋은 책, 나아가 마음에 남은 시집이 되었는지 독자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겁니다.


[곡두의 이름은 아슬한 환상]

마흔넷의 곡두*가 자리한 시집의 목소리는 적나라하고, 담담하며, 의연합니다. 일관된 분위기를 보여주지만 등장하는 이름은 수십인데, 목소리는 이름 자신이 되거나, 이름의 말을 대신 전하며, 그것도 아니라면 이름과 함께하는 장면을 보여주죠. 아무런 장치가 없었다면 독자 입장에서 어디선가 들어봤을 익숙한 이름들의 향연에 ‘시인 - 시 - 독자’의 간격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는 착각을 유발할 수 있지만, 시인은 침착했어요. 수록된 모든 시에 ‘곡두’를 붙임으로써 분명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존재하지 않는 환상으로 만들었고, 시집은 그렇게 존재와 무 사이 특정하기 어려운 곡두라는 지점에 안착해 시인, 시, 독자 가운데 누구와도 닿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러지 못할 거리감을 부여했죠. 이는 자신을 포함해 시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언어를 먹었기에 생기는 감정에 익사하지 않도록 하는 시인의 차갑고도 따뜻한 배려입니다.


과몰입 방지턱인 곡두 이야기를 계속하면, 위에서 언급했듯 곡두는 이 시집을 아슬아슬, 또는 위태로운 경계에 위치시켜요. 곡두가 없었다면 다른 시인의 장례식장에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수를 쓰는(곡두 3,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 사람들에게, 발생하지 않을 일에 대한 우려와 질투 섞인 뒷말, 혹은 비판의 탈을 쓴 비난, 예컨대 고여서 썩어가고 있던 건 자신들이었음에도 미술관에 자기 기준으로 외설적인 작품이 걸렸다며 지팡이로 작품을 망치려 했던 속물들이 존재했듯, 비아냥거리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며 왜곡된 분노만 가득한 승냥이들 입에서 '일기장이냐' '제목으로 어그로 끄네' '이름 팔아 시쓰냐' 따위의 말이 더 많이 튀어나왔겠죠. 시집의 맥락을 따졌을 때 곡두 속에서 호명받지 못한,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인 입장에서 신경 쓰이기나 하겠냐만, 능구렁이 같은 곡두는 그것들로부터 이 시집을 지키는 것에 큰 역할을 하고 있어요. 존재했던 시간을 환상으로 만드는 아슬아슬함을 관찰했을 때 얼마나 재밌던지.


이 시집에서 할 말이 곡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곡두는 이런저런 이야기와 이름들이 함께하거든요. 화자는 새해 첫날 일요일, 시에다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겠다 다짐하지만(곡두 1, 1월 1일 일요일) 지키기 어려웠던지 곳곳에서 정감 있는 험한 말을 보여주고, 장례식장에서까지 뒤틀린 욕망을 보여주는 이들을 곱씹어요(곡두 3). 또한 독자에게 추측으로만 다가올 두 이름을 성당에서 몰래 속삭이고(곡두 8, 쾰른 성당), 대장항문과 의사와 시인과 출판사 대표의 이름이 같은 것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습니다(곡두 18,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때로는 선생님의 끝나가는 시간을 담거나(곡두 21, 열하고도 하루쯤 전일 거다) 멀리 떠나버린 시인 언니를 생각하고(곡두 22, 수경의 점 점 점), 감자와 양파를 받습니다(곡두 25, 철규의 감자) (곡두 26, 준이의 양파). 그리고 중간중간 네 가지의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곡두 19, 20, 39, 43)를 통해 화자의 눈과 귀를 보여줘요. 그런 곡두를 읽다 보니 문득 질문이 떠올랐어요. 시인은 어째서 이런 사적인 인상의 시로 시집을 채워 넣은 걸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지는 거야]

'붙잡아두려 한다'.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입니다. 이런 기억들이 분명 있었다는 증거를 남겨두기 위해 화자가 말하는 걸로 보였어요. 앞으로 타인이 사라지며 헤어지거나, 화자가 세상을 떠나며 시집에서 호명한 사람들과 헤어질 순간이 올 테니,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다'며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잊힐 기억들을 못 박는다는 인상이었죠. 화자는 뜬금없이 "우리 헤어져!"라 선언하는 게 아니라 기록해야 한다 생각했던 것들을 통해 시집의 제목처럼 헤어짐을 준비하는 거죠. 제목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라는 제목은 독자들이 음란마귀의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적나라한 제목입니다. 실제로 SNS에서 시집과 관련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제목이 암시하는 거기(남성기)와 여기(여성기)에 대한 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호명과 기억, 그리고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보다 외설적 측면을 주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아쉽습니다.


헤어짐에는 '우리 헤어지자'의 자발적 요인과 사별 같은 외부요인이 있습니다. 헤어짐 이전에는 만남이 있어야 하고, 만났기에 헤어지며, 헤어짐과 만남 사이에는 관계가 존재하는데, 당연하지만 쉽게 까먹는 이야기죠. 제목에 등장하는 나와 너의 관계는 너의 거기가 작고 나의 여기가 크기에 헤어지는 중이랍니다. 시인의 말과 뒤표지에서 사랑을 말하고 있으니 제목을 사랑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뭔가 크고 작기에 합이 맞지 않아 화자가 헤어짐을 떠올리고 있지만, 헤어지는 중이니 아직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목을 흠칫하며 발견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남성기 여성기만 떠올리고 생각을 멈춰요. 누군가와 관계를 끝내는 나와 너의 변수가 성적 쾌감뿐이라면 얼마나 슬퍼요. 그러니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면, '거기'와 '여기'는 기대, 욕망, 그릇, 방 혹은 '곡두 6(나는 뒤끝 짱 있음)'에 나오는 것처럼 설렘, 잔고, 이자, 뒤끝의 규모가 될 수 있어요. 왜요 생각보다 사람들은 속물적인 이유들로 헤어지기도 하잖아요. 저 대신 이유를 곱씹어줬으면 해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헤어짐에 필요한 크고 작은 것을 더 많이 떠올린다면, 우리는 보다 풍성해질 수 있겠죠.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겠지만, 이 시집에는 시대를 꿰뚫는 시선이나 정신, 그걸 지탱하는 엄숙함이 없습니다. 몽글몽글한 서정으로 가득 찬 것도 아니며 언어를 파괴하며 드러나는 기교도 보이지 않아요. 좋은 책의 조건이 그것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김민정 시인의 신간은 부정적으로 보일 테지요. 알라딘 100자 평에 ‘시집에 이런 제목을 달아야 팔리는 출판업계의 현실’ ‘이제는 시인 김민정보다 편집자 김민정이 더 좋다’는 말을 쓰고 부연설명 하나 없는 사람과 거기에 공감을 누른 이들에게 이야기를 듣고픈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시집에는 어떤 제목이 붙어야 하고 점잖은 제목이 달리면 그 책은 괜찮은 책에 한걸음 더 가까워지는지, 시인의 업과 편집자의 업에 우열을 만든 요인이 있다면 무엇인지, 당신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란 무엇이며 애초에 말은 무엇으로 완성될 수 있는지 나는 듣고 싶습니다. 좋아함에 이유가 없다면 아쉬움에 그치지만, 싫어함에 설득력 있는 이유가 없다면 그건 혐오니까요. 말로 사람을 죽이기 보다 쉬워진 세상에서, 칼이 된 말이 다음 희생자를 찾아 배회하는 시공간에서 우리는 보다 명확하게 말할 필요가, 보다 긴 호흡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나는 이 시집의 비대하지 않은 자의식이 좋습니다. 김홍중 교수가 <사회학적 파상력>에서 말하는 리스크 토템에서 기원한, 희생과 인내에 기반해 완전무결하고 남들보다 우월해야만 하는 자의식이 느껴지지 않아 편안합니다. 새로움을 명분으로 권위를 쌓아 종국에는 시 안팎에서 타자를 잡아먹을 폭력성이 잠재하지 않고, 형식의 자유, 말과 의식 사이 경계를 말하지만 결국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파괴만 남은 오만한 깡통보다 자극적이지 않은 이 시집은 전자와 같은 말의 소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대답할 수 없지만 시인은 보다 성숙해졌고, 함부로 말하기 그런 성숙의 이유를 짚어보기 이전에 기쁨을 표현한 제 자신의 야만이 역겹습니다. 다 만나려고 이별하고 또 이별하려고 만나는 것을 끝끝내 알아버린 화자의 마음(곡두 13)을 목격해서 조금은 슬프고, 이 모든 것이 곡두임을 무심하게 알리며 저를 양지로 끄집어 올리는 시인의 냉철함이 시원합니다. 숨겨졌거나 새로운 게 아니라 그저 좋아서, 그걸 말하고 싶을 정도의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서 나는 이 시집이 좋습니다.


한 해가 끝나갑니다. 올해와 헤어지며 지난날이 될 새해를 준비하고, 우리는 모두와 헤어지며 사랑을 할 겁니다. 시인의 말처럼 가장 사랑하는 것 없이 많은 사랑이 함께하길, 시인 박준이 발문에서 말하듯 한 품 너르고 커진 곳에서 언제든 폴짝할 수 있기를.


*곡두 : 실제로는 눈앞에 없는 사람이나 물건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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