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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GO Sep 03. 2019

진짜 요새에 갔던 날.

시편 62편 그리고 그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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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부터 8월까지.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사이 갑작스런 2주간의 한국행. 돌아온 후 바로 일터로. 사실 나는 지칠만 했다. 주어진 시간표대로 무미건조하게 일을 하며 지냈다. 일 외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 버킹엄 매장에 일손이 부족해 커버를 갔다. 빅토리아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매장이라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안되겠다 싶어 새벽출근 하는 금요일(30일)에 어디라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토요일도 휴무라 1박 2일로 가면 좋은데. 구글맵을 켜고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보니 비싸고 숙소도 여의치 않았다. 어딜가지, 하다 눈에 들어왔던 곳은 집에서 꽤 가까이 위치한 Reigate hill 이었다.


새벽출근을 한 금요일.


짧은 근무가 끝나고 직원할인으로 물과 콜라, 샐러드 그리고 소시지롤을 챙겼다. 나름의 도시락을 챙기고 마트에 가서 간식으로 2파운드짜리 블랙베리를 샀다. 소풍 갈 준비 완료. 그리고 Reigate 역으로 출발.

  

Clapham junction 역으로 가서 Reigate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40여분이 걸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하늘에 구름이 많아져 흐려질까봐 걱정했는데 역시 영국 답게 구름의 움직이 빠르다. Reigate 역에 도착하니 언제 그랬냐는듯 햇빛이 얼굴을 비추고 날은 금세 환해졌다. 역에서 내가 가려는 Hill 까지 걸어서도 갈 수 있고, 곧장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천천히 걸어보자 해서 걸었다. 걷는 길이 살짝의 오르막길이고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라 걷다가 한 정류장을 남겨놓고 버스를 탔다.


한 정거장을 타겠냐고 의아해하던 기사님의 표정과 너무 힘들어서 타야겠다는 나의 표정.

아 바로 버스를 탔으면 좋았을 걸.


버스에서 내려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를 지나 겨우 힐에 도착했다. 오는 과정이 언제 그랬냐는듯 힐에서 보이는 푸르른 전경이 날 반겨주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힐에 올라오니 햇빛은 따사로운데 바람이 솔솔 불어 그리 덥지가 않았다. 새벽 출근 때 입고 온 청자켓을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꽤 가까운 곳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약 1시간 반이 걸렸다.) 도심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구글맵을 보니 길이 이어져 있길래 Hill 안의 길을 따라 어느 곳 까지 걸어갔다.

그 곳은 바로, Reigate Fort.

Fort, Fortress. 요새에 온 것이다.

이 요새는 1900년 무렵에 프랑스 군으로부터 런던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적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공격할 수 있으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곳. 그 곳이 요새라는 것을, 직접 요새를 보고 나는 깨닫게 되었다.

요새로 들어가니 또다시 아름다운 전경이 보이고, 나 혼자여서 고요하기만 했다.


요새 안에서, 한참을 서있으니 불현듯 다윗과 그가 지은 시편 62편이 떠올랐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중략)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생략)



다윗은 하나님을, 주님은 나의 산성, 나의 요새, 라고 표현한다. 요새에 철푸덕 앉아보니 비로소 그 의미가 피부에 와닿았다. 주님 품 안에 있으면 나를 보호할 수 있고 적을 볼 수 있으며 공격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걸. 그 품 안에 있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요새 안에 자리를 잡을까 하다 도로 처음 도착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매트를 펴고 앉았다. 눈을 들면 아름다운 초록들이 빼곡하다. 나무들이 촘촘히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낸 것만 같다. 저 너머로 희미하게 지평선처럼, 옅은 초록들이 있다. 내가 앉은 곳 왼쪽엔 큰 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바람에 파르르, 잎사귀들이 떨리고 있다. 그 소리가 꼭 초가을 소리 같았다.


이제 여름이 갔구나. 정말 갔구나.


챙겨온 블랙베리를 물에 씻어 하나씩 먹으며 가져온 책을 조금 읽었다. 새벽출근의 피로가 다시 찾아와 이내 졸렸다. 책을 얼굴에 덮어 강렬한 햇빛을 막아버리고 나는 아주 짧은 단잠에 빠졌다. 시원한 바람에 옷이 나풀거려 잠에서 깼다. 누였던 몸을 일으켜 다시 앉아 글을 썼다. 아주 오랜만에 말이다. 그리고 음악을 들었다. 시편 62편에 멜로디를 붙여 지어진 찬양, <오직 주만이> 가 생각이 났다. 소향이 부른 버전을 오랜만에 틀었다. 찬양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깊이 잠겼다.


시간이 지나 이 시절을 추억할 때, Reigate hill의 이 시간은 어떻게 기억되어질까.


2014년에 갑자기 휴학을 하고 부산과 통영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지나고 추억해보니 그때 주님이 나와 함께 여행하셨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따뜻했다. 지금 주님과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도 지난 뒤에 따스한 추억이 되길.


주님과 나만 아는 순간, 아 이 소중한 순간을 어찌 다 공유할 수 있을까.


사방이 막히고 바닥이라 느끼는 때에도 주님은 한결같이 나와 추억을 만드신다. 나는 아직도 모든게 서툴고 무섭고 어려운데... 주님은 여전한 손길로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곳으로 나를 이끄신다.


Reigate hill 도 생각해보니 8월의 끝자락에 뜬금없이 올 줄은 몰랐다. 더구나 그 힐에 요새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는데. 주님이 나에게 요새를 보여주고 싶으셨나봐. 내가 요새같은 당신의 성품을 묵상했으면 했나봐.


그 다음... 나는 어디에 있을까? 뜻하신 그 곳에 내가 있길 원하는데.

그건 그거고 주님은 지금 내가 런던에서 어떻게 있길 원하시는 걸까. 왜 허락하시는 걸까.


사람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자.

주님의 사랑을 전하자. 주님을 전하자. 복음을 전하자.


그리고 이제는 정말 글을 쓰자. 글로 풀어내자.


이런 생각들을 노트에 쏟아내고나니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었다. 몸을 일으켜 툴툴 털고 매트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냥 나가기가 너무 아쉬운 찰나,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게 보였다.


다시 역까지 가는 버스 시간이 30분 정도가 남아 잘됐다 싶어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을 샀다. 햇빛의 온도는 조금 식었고 바람도 제법 차게 불었다. 부는 바람에 아이스크림이 녹으려 해 얼른 먹으며 다시금 이 곳을 내 눈에 담았다.



아름다운 전경을, 이곳에서 내가 묵상했던 주님의 성품을, 그리고 빠르고 깊게 지나가던 생각들을.


8월 30일의 피크닉은 참으로 귀하고 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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