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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여행가쏭 May 12. 2018

20개월 아이에게 배우는 아이다움

성장의 근원, 호기심.

참 좋을 때다.


중학생 시절,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친구의 어머니께서 웃고 있는 우리 둘을 보며 '참 좋을 때다'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자, 별거 아닌 것에 그렇게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우리들이 부럽다고 하셨다. 한 번 웃음이 터지면 눈만 마주쳐도 웃고, 물건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웃던 때였다. 배가 아프고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던 기억도 있다. 그 친구와는 아직도 거의 매일 연락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때처럼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언제인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소리 내서 웃을 일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루 종일 웃지 않았던 날도 많았던 것 같다. 내가 다시 웃음이 많아진 건 육아를 하면서 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꺄르르 소리를 내며 웃는 아이를 볼 때면 다시 힘이 났다. 도망가는 아이를 쫒아가기만 해도, 배에 뽀뽀만 해줘도 자지러지듯 웃었다. 신나는 노래를 틀어주면 폴짝폴짝 뛰며 춤을 추고, 사과를 주면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까꿍 놀이를 하면 꺄르르 웃었고, 산책을 하다가 강아지를 만나면 "멍멍"이라고 외치며 신나서 뛰어갔다. 별거 아닌 것에도 우와를 연발하는 아이였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내가 받고 있는 게 더 많음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웃을 일이 훨씬 많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루하루 더 많이 웃을 수 있다는 건 더 행복해졌다는 의미일 테니까. 친구의 어머니가 나를 보며 말씀하셨던 '참 좋을 때다'의 느낌을 내가 아이를 보며 느끼고 있었다. 궁금한 게 많고, 좋고 싫음이 명확하고, 그래서 울 때도 많지만 그만큼 웃을 일도 많은 아이였다. 사과 하나에도 행복해지는 아이를 보며 나의 아이다움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의 아이다움은 언제부터 사라진 걸까?


어른이 되고 튀지 않아야 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면서 나의 아이다움은 점점 사라졌던 것 같다. 튀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나의 취향을 감췄고, 호기심을 따르기보다는 해야 할 일들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웃을 일이 사라졌다. 나의 아이다움을 다시 찾고 싶어 졌을 때, 스승이 되어 줄 아기가 내 옆에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에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자 아이의 모든 것이 대단해 보였다. 잘 웃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엄청났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궁금한 게 뭐 이리 많을까?' 다 처음 보는 것이니까 그렇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니 아기가 궁금해하는 것들 중에는 나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물고기의 종류도, 꽃의 이름도, 길가에 가로수도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일까? 호기심을 느꼈을 때 그것을 탐구하지 않고 무심히 넘겼던 상황이 반복되면서 호기심 조차 사라져 버린 듯했다. 궁금한 게 생기면 탐구해야 했다. 호기심은 충족될수록 새로운 호기심이 생겨나는 법이니까.


처음엔 호기심이 있으면 지루하지 않겠다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기에게 호기심이란 성장의 근원이라고 할 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20개월 만에 목을 가누고, 뒤집고, 혼자 앉고, 서고, 걷고, 뛰고 할 수 있게 된 것은 궁금한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나는 소리가 궁금해 고개를 돌렸고 앞에 있는 물건을 만져보고 싶어서 배밀이를 했다. 호기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하진 못하더라도 평생 성장하며 살고 싶었다. 지금처럼 해야 할 일만 해서는 성장하는데에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계속 성장하려면 잠들어 있는
호기심을 깨워야 했다.


아이들에게 호기심 충족은 대부분 놀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시기별 대표적인 장난감이 있기도 하다. 7개월에는 치발기, 10개월에는 쏘서, 13개월에는 걸음마 보조기. 이미 흥미를 느낄 시기가 지난 장난감을 주면 아이는 지루해한다. 꼭 장난감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이에게 모든 건 호기심의 대상이고 놀잇감이니까. 중요한 건 즐거움을 찾아 나서는 아이의 태도였다. 질리거나 지루해지면 서랍을 열거나 화장대에 올라가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 나섰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울기도 했다. 즐거움을 찾는 데에 있어 굉장히 능동적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놀잇감은 무엇일까? 흥미, 취미라고 할 만한 것들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일상이 무료하고 지루하다고 불평만 할 뿐 내가 찾아 나선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는 것으로 안되면 걸었고, 걷는 것으로 안되면 뛰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던 아이에 비해 나는 너무 수동적이었던 것이다. 즐거움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모임을 찾아다녔고, 흥미가 느껴지는 분야가 생기면 책을 20권이 넘게 사서 보기도 했다. 관심이 가는 일이 생기면 놀이처럼 하나 둘 시도했을 뿐인데,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다.


한 때 아이처럼 잘 웃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성인이 되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니 이런 아이다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궁금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해보는 사람들. 관심사에 푹 빠져서 덕질을 하는 사람들. 유쾌하고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들. 자신만의 취향이 확실한 사람들. 나이가 들어도 이런 아이다움을 지닌 채 살아갈 수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로 했다. 궁금한 게 생기면 배우고,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해보고, 무엇보다 즐겁고 신나는 일을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아이다움을 간직한 채로. 

 


아이와 함께하며
나의 아이다움을 깨워 보기로 했다.







[다음편] 나와 맞지 않는 것을 만나는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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