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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Aug 08. 2020

정의란 무엇인가

<콜리니 케이스> 진실은 숨길 수 있어도 영원히 감출 순 없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것은 딱 정해져 있는 듯하지만, 현실에서 적용하는  쉽지 않습니다. 단어가 공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반면 저마다 다른 개인적인 사정과, 이에 기반한 상대적인 측면에서 해석이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도 그런 사례를 많이 만납니다. 정말 고객가치를 높이고 사회적 의미를 지닌 일인데도 중소기업 상생이 문제 된다거나, 좋은 기업문화를 만들겠다는 방침이 역차별을 만든다는 반발을 듣기도 합니다. 이처럼 정의나 공정은 참 어렵습니다.     


법치국가에서 법은 그래도 최대한 공정하고 정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만,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법은 양심과 이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지켜져야 할까요? 영화 <콜리니 케이스>는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 줍니다.     

범인 콜리니의 살해동기를 밝혀야 한다! 3개월차 국선변호사의 추적이 시작됩니다.

독일 굴지의 자동차기업 회장 한스 마이어가 호텔 스위트룸에서 살해당합니다. 권총 3발을 쏜 뒤 그의 얼굴을 짓밟은 범인은 호텔 로비로 내려와 “스위트룸의 고객이 살해됐다”고 담담히 전하고 체포됩니다.

살인범의 이름은 파브리지오 콜리니로 이탈리아인입니다. 변호인으로 터키계 독일인이자, 이제 3개월차 국선변호사인 카스파가 배정됩니다. 사건 정보를 받아든 그는, 죽은 이가 바로 자신을 어릴 적부터 자식처럼 돌봐온 후견인임을 알게 됩니다. 예전 본명으론 몰랐던 것이죠.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살해한 ‘적’ 콜리니를 변호하는 게 맞을지 고민하는 카스파! 하지만 그는 변호사의 의무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살해 동기에 대해 계속해 묵묵부답인 콜리니. 재판은 ‘독일을 대표하는 훌륭한 기업가를 무참히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인’에 대한 단죄로 마무리될 듯합니다. 하지만 살해범 총기에 의문을 품은 카스파가 재판 연기를 신청하고, 어린 시절 후견인의 집에 감춰져 있던 권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선 다시금 사건의 원인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실이 공개됩니다. 한스 마이어는 나치 친위대의 간부였으며, 또 독일인 두 명의 죽음을 앙갚음하기 위해 무고한 이탈리아 시민 20명을 공개 처형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콜리니의 아버지 또한 그렇게 죽게 된 것이었지요.

이제 법원의 판결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진실은 밝혀지는 법입니다. 잠시라면 몰라도, 영원히 감출 순 없습니다.

상대편 변호사의 말처럼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모르고,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특수한 상황을 인정하더라도, 나치 친위대의 선봉에 서서 상대편 군대가 아닌 민간인들을 마구 죽이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한스 마이어가 소속된 나치 친위대의 통역 역할을 한 인물을 사형시키기까지 한 이탈리아의 사례만 보도라도, 뭔가 조치가 이뤄져야 했음이 당연합니다.


특히 콜리니는 더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 후 이름을 바꿔 살고 있는 한스 마이어를 찾아내 고소까지 했는데도 ‘공소권 없음’으로 아무런 수사나 재판이 이뤄지지 않는다니... 마음 속 그의 한(恨)은 계속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로 인해 아버지가 처형대로 끌려 나왔다는 죄책감, 어머니와 누나의 마음을 괴롭게 할 수는 없다는 책임감, 총살당해 죽는 아버지를 기절할 때까지 눈앞에서 쳐다보게 한 한스 마이어를 향한 분노 등이 뒤엉켜 평생을 살아온 그가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세월이 흘러 만난 마이어와 콜리니. 콜리니 눈엔 여전히 학살자 나치 친위대 장교로 보였었나 봅니다.

물론 살인을 살인으로 보복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잘못입니다. 콜리니도 알고 있었기에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자살을 택했겠지요. 그에게 자살은 고통뿐이었던 세상과 안녕을 고하는 안식인 동시에, 자신의 살인 행위에 대한 참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스 마이어의 처지에서 보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게 안타깝기도 합니다. 제 느낌에 그는 파렴치한 악인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전쟁의 시기 소속 부대에서 나치주의자로 악명 떨쳤지만 그게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잘 알았고, 전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홀어미 밑에서 크는 외국계 아이인 카스파를 자식처럼 후견했고, 주변에 자선을 베풀면서 모든 사람에게 칭송받는 사업가가 될 수 있었겠지요. 게다가 신의 심판처럼 아들 내외와 손자가 사고로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봐 줄 만하지 않을까요? (그저 제 생각일 뿐입니다.)


한 발 더 나가 한스 마이어가 자기 잘못을 대놓고 인정하며 당사자들에게 사죄하면 어땠을까도 상상해 봅니다. 세계대전 직후라면 죽음의 위협을 피하려 이름을 바꾸고 숨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법 개정으로 심판을 면하게 된 이후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평생토록 과거 잘못을 후회면서 혹시 공개되진 않을까, 누가 복수하진 않을까 떨고 지내기보다는 고백하는 게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생각이 그렇단 말이지, 실제는 정말 성자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큰 죄일수록 잘못을 꺼내놓고 인정하긴 어려운 법입니다. 어차피 용서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오명만 쌓일 게 뻔하기에 그냥 묻어두고 갈 수밖에 없는 게 한스 마이어나, 우리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상대편 변호사이자 카스파의 대학 은사이기도 했던 리차드 교수, 그는 세계대전 속 전범이 지은 죄를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로 간주해 공소시효를 줄이는 법안을 만든 당사자 중 하나입니다. 그는 당시 상황이 특수성을 얘기하면서도 해당 법 제정이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일말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스 마이어의 과거를 알면서도 감췄던 리차드 교수. 끝까지 진실 반대편에 섰던 변호사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콜리니 편에 선 카스파를 비난하던 한스 마이어의 딸 역시 “할아버지가 그랬다면 나도 그런 사람일까?” 질문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요. 이처럼 외면치 않고 직면할 때 정의가 바로 서지 않나 싶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의 영역이 얼마만큼인가를 생각하면 복잡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에게 신은, 그리고 친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너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야!”      


깊이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정의를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는 내 이익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반대로 세상이 이렇게 된 걸 다 남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이어였다가 콜리니였다가 오가며 정말 정의 없는 삶 속에 헤매고 있진 않을까요? 공정하게 모두를 위한 것인 양 내 배 속을 채우려는 잣대로 평가하거나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 모습을 돌아봅니다. 죄가 감춰지지 않을 정도로까지 커지기 전에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신이여,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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