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강수지 2집> : 사랑은 흩어지고 이름만 남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다만 상대는 자주, 아니 가끔 바뀌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학년이 바뀌고 짝이 달라질 때마다 기존 님을 향했던 일편단심은 자꾸 변덕을 부렸다. 금사빠였음이 분명하다. 유년 시절 이런 심약함이 가져온 바람둥이 기질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을까? 맞다. 청소년기 교회 친구를 좋아했던 건 오랫동안 한 사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남자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이제야 깨달았다! 푸하핫, 역시 결과를 가지고 앞의 일들을 짜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통찰이 아니라 그저 궤변일 뿐이다.
연속적인 사랑이 멈춘 적이 한 번 있었다. 바로 중학생 시절이었다. 그토록 남녀공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운명은 내 바람을 외면했다. 뺑뺑이로 배정된 곳은 버스로 이동거리만 40여분에 달하는 수원 끝자락의 학교였다. 새 환경에 적응할 새도 없이 1년 여가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1991년 가을, 텔레비전에서 세상 둘도 없는 아름다운 여인을 봤다. <흩어진 나날들>을 부르는 강수지였다.
그녀를 모르진 않았다. 바로 전년 MBC 여자신인가수상을 받은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땐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부터 쭉 발라드 마니아인 나는 <찬바람이 불면> 김지연을 응원했었다. <보라빛 향기>라는 노래는 별로였고, 모자 쓴 빼빼 마른 여가수는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로 유명한 이지연 만큼의 매력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강수지 문제가 아닌, 그녀를 제대로 못 알아본 내 문제였다. 역시 난 금사빠였다. 그간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었다. 숏커트 여자가 저렇게 예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맑은 목소리는 또 어떻고... ‘청순가련’ 단어의 뜻을 그때서야 실감했다.
<흩어진 나날들>은 참 괜찮은 노래고, 가수와도 잘 어울린다. ‘어두운 마음에 불을 켠 이름’이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변하는 이별의 애절함이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현실감 있게 전달된다. 무너져내릴 듯 슬프지만 감당해야한다. 둘은 사랑했기에 정말로 처음부터 상관없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헤어져서 삶의 나날들이 힘겨워졌다는 절망과, 거리 어딘가엔 사랑의 파편이 등불처럼 남아있을 거란 여운이 공존한다. 이 느낌은 직접 노랫말을 쓴 그녀가 아니면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다.
강수지 2집에는 <흩어진 나날들>과 함께 그해 큰 인기를 끌었던 <시간 속의 향기> 등 총 8곡이 담겨있다. 학교에 오가며 소형 카세트로 참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 제목을 살펴보니 두어 곡은 가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수가... 내 애정이 그 정도뿐이었단 말인가? 아마도 당시 난 이 앨범보단 강수지란 인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켰던 것 같다. 강수지가 나오는 음악 프로그램을 빠짐없이 녹화했고, 하이틴 잡지 기사를 섭렵했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팔달문 시장에 위치한 연예인 사진 파는 매장을 찾아다녔다. 그녀가 펴낸 <어두운 마음에 불을 켠 이름 하나>란 에세이집도 구입해 보라색 펜으로 줄까지 그어가며 아주 열심히 읽었다. 아마 서울에 살았다면 공개방송을 따라다니는 사생팬이었을 게 분명하다. 책을 빼곤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그때 난 뜨거웠다.
열병은 중학교 생활을 마쳐가는 시기 즈음 끝났다. “연예인에 너무 빠지면 안 된다”는 담임 선생님 말씀을 따를 정도로 모범학생은 아니었고, 고등학교 생활을 앞두고 학업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닌 듯한데... 유효기간이 다 됐던 것일까? 남자 가수와 사귄다는 소식에 그녀를 놓아줬거나, 어쩌면 그녀가 다음 앨범 준비하는 시기를 못 참고 새로운 사랑에 빠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시절 <달빛 가족>에 나오는 최수지란 미모의 배우가 있었다. <건축학 개론> 속에 나오는 국민 첫사랑 배우도 수지다. 수지란 이름은 마력을 지녔다. 내가 강수지에게 빠졌던 것은 분명 그 이름의 마력 때문이다. 그래도 질풍노도의 시기, 다른 연예인이 아닌 강수지를 좋아해서 다행이다. 그때 강수지 책을 열심히 읽은 덕에 감성을 유지한 채 고교 문학동아리에 들어갔고, 꼴에 홍보 전문가라며 회사서 월급받고 일하고 있으니 말이다. 글을 쓴 이참에 강수지 유튜브 채널 구독 신청이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