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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Jun 16. 2023

따야 할 시기를 놓친 과일은 썩어버려

오피스워크 말고 어디까지 해봤니 #3


2020년 연말에 시골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따며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를 만끽할 때 텀블러(Tumblr)에 쓴 글입니다. 가져오면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농장에 살고 일하며 자연과 가까이 지내면서 느낀 점들을 기록했던 글이어서 가져왔어요. 캐리어 하나만 들고 불편한 오두막에서 지내도 행복하고 영감이 넘쳤던 때가 떠오르게 하는 글을 읽자니, 지금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으면서도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는 마음이 드네요.






이 글은 농장의 호주인 슈퍼바이저 게빈의 말에서 영감을 받아 적게 되었다. 그의 말을 그대로 가져오면 'The fruit doesn't last forever', 즉 모든 건 다 때가 있다, 따야 할 시기를 놓친 과일은 썩어버리니까.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이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자연이었다. 농장일을 체험하면서 이 당연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로 농작물은 작물마다 수확 시기가 있고 그 시기를 벗어나면 이 작물을 재배하고 싶어도 재배할 수가 없다. 둘째로 농작물을 수확하고 싶어도 그날의 날씨가 받쳐주어야 한다는 것. 비가 오거나 바람이 너무 세게 부는 것은 물론, 너무 더워도 안 되고 심지어 내가 수확하는 '베리' 작물은 그날 아침의 습도에도 영향을 받는다. 셋째는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면 수확한 작물이 또다시 성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잊고 있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대자연은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끊임없이 자양분을 줘서 생존과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니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자연의 불가항력을 깨닫게 하는 배움의 과정이기도 했다.


캐빈에서의 생활은 자연을 더욱 가까이서 느끼게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든 아니든, 어차피 이곳에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므로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그 과정에 산속의 오두막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농장 지역에 사는 사람들마저도 부시 라이프(Bush life)라고 부르는 산속에 있는 캐러반 생활을 시작해 보니 자연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사실 서울에 비교하면 시드니 또한 시골 같지만 (시골 비하가 아니라 자연과 가깝고 인구밀도가 낮다는 뜻) 시드니에서의 '슬기로운 코로나 생활'을 마치고 농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워킹홀리데이 시즌2가 시작되었다. 시드니에서의 삶이 새로운 곳에서의 자립능력을 길러주고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면, 농장에서의 삶은 또 다른 종류의 확신을 심어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최소한의 문명과 함께 살아가는 아날로그적인 생활 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이로써 내가 꼭 문명국가에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를 확인했다. 일단은 이 세계 어디에 가도 캐리어 하나면 삶을 유지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숱하게 들어온 '미니멀리즘'의 개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짐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면 불필요한 것들을 빼고 온전히 필요한 것들만 넣어 가득 찬 캐리어만큼 내 생활 또한 더 밀도 있어진다. 밀도 있는 삶은 결국 '무'의 상태와도 가까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제대로 느끼는 밀도 또한 가져다준다는 역설. 그러면서 그동안 '문명'이라는 것에 주의를 빼앗기느라 자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했다. 조금 불편해도 괜찮은데 우린 너무 많은 걸 소유했고, 한 가지에 집중하지 않고 여러 개를 동시에 하느라 주의를 분산시켰으며 그것들을 잘 해내기 위해 또 다른 문명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것도. 자연은 시시각각 변하면서도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주는데 사실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해 왔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자연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단순해지는 만큼 삶은 더 명료해졌다.


이른 새벽, 해가 뜨는 것이 창문에서 바로 보였다


다섯 시, 아침에 일어나면서 머리맡에서 눈을 돌리면 바로 해가 뜨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일곱 시, 출근해서 맡는 상쾌한 공기는 생각을 비우고 블루베리를 따는 행위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이걸 매일 반복하다 보면 생각과 마음이 건전해졌다. 열두 시에서 두시 사이, 머리 위의 햇빛이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기. 햇빛에 그을리면 얼마나 따가운지, 그래서 농장일을 하면 목 뒷부분과 손등에서부터 팔등이 얼마나 새까맣게 타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크림을 발라도 수두룩하게 생기는 주근깨와 기미를 경험하는 중이기도 하.

네시에 퇴근하고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마시는 캔맥주 한잔은 도시의 그 어느 펍에서 마셨던 생맥주보다 맛있고 짜릿하다.

일곱 시가 넘어 해가 지고 고요해진 산속에는 바람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각자의 침상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다 보면 노곤해진다.

아홉 시쯤 몸이 녹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침대에 폭 파묻혀 자다 보면 다시 새벽에 오곤 하는 삶이 지금까지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이 카라반에서의 삶을 앞으로 약 한 달간 계속할 예정인데 불편하다고 보면 불편할 수 있을 이 생활이 나중에 그리워질 거라는 걸 벌써부터 알고 있다. 같이 묵고 있는 친구들과 다시 문명이 있는 곳으로 어떻게 돌아가지?라는 고민을 벌써부터 하고 있다.


선선한 오후, 케빈에서 바라본 풍경.


을 보려면 30분은 넘게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케빈에서 최소한의 것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만 장을 봐와서 내 손으로 만든 점심을 별 다른 테이블도 의자도 없이 잔디밭에 철퍼덕 앉아서 먹는 삶도, 캄캄한 밤에 작은 램프에 의지해 고기를 구워 먹고 잠자리에 드는 캠핑 같은 삶도 다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도시의 삶과 비교하면 한없이 불편한 삶이겠지만 그 불편을 선택하고 감수해서 얻는 것이 있다는 걸 하루가 다르게 경험해 가는 중이다. 각자 연령도 출신 지역도 살아온 맥락도 다른 우리가 어떻게 운명이 이끄는 대로 살다 보니 한정된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소중한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도 인생을 두고 기억할만한 선물이겠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축복을 공유하는 선물 말이다.

사람들 사이엔 끊임없이 말들이 생겨나고 감정의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지만 거대한 자연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늘 크고 작은 잡음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 감정은 밀물 밀려오듯이 왔다가 다시 썰물처럼 지나가는 가변적인 속성을 지녔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이고, 다 의미 없으니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하는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게 이 자연이 주는 풍요와 휴식은 결국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각자 생긴 모습대로 그리고 맡은 역할 대로 살아갈 힘을 가졌다는 걸 자연이 일깨워준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는 묘미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




원문 출처- https://www.tumblr.com/fearless-grace/63400488933543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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