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사리 Jul 12. 2023

마음을 여는만큼만 열리는 세계

엄마는 뿌리를 옮겨 심은 나무야 - 세 번째

며칠 전,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구의 기쁜 소식을 듣고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인스타그램, 링크드인, 페이스북 등 내가 활동하는 모든 소셜네트워크가 연결된 친구였다.

  
'문은 그냥 두드려서는 열리지 않는 거구나. 항상 쾅쾅 두드려야만 문이 열리는 것 같아'
이 친구와 대학시절 나눴던 대화를 아직까지도 기억하는데, 서른이 넘어 각자 다른나라로 건너가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친구는 내게 말했다.


'뭐든지 너무 애쓰지 말고, 지금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열리지 않는 문은 내버려 두고 열리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아닐까.' (영어가 섞여있어 의역했.)


그리고 친구의 메시지에 물개박수를 치며 공감한 나.
우리는 확실히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삶을 살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내 삶의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더 이상 모든 것에 너무 애쓰지 않게 되었고, 안 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며 너무 얽매이지 않는 법을 어느새 터득했다. 만나는 사람들의 범주가 훨씬 넓어졌지만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위해 너무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와 억지로 관계를 맺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가까이하게 되고 엮이는 인연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를 이루는 문화와 가치관 같은 - 정신적인 영역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사는 환경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내게 당연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당연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지 않게 되었고, 고집 세던 내가 스스로 틀렸음을 인지하면 그걸 인정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대부분의 이곳에 와서 새로 만난 친구들은, 나와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살아온 경우가 많다. 같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더라도, 그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의 경험들은 한국 본토에서 온 나와는 확연히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런 친구들과 얼마나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을까, 의심하며 보낸 호주에서의 첫해를 기억한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말,


너 영어 진짜 많이 늘었어 - 내가 널 처음 봤을 때는 너 거의 얘기도 못했던 것 같은데.

Your English has improved a lot! I thought you barely spoke the language when we first met.


얼마 전 내가 호주에서 만난 친구들 중 가장 애정하는 친구 중 하나가 한 이야기다. 그 친구의 의도는 나의 언어 성장에 대해 칭찬해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 솔직히 듣는 당시엔 '내가 그렇게 영어를 못했었나?'하고 조금 충격이었다. 우리는 삶의 전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같이 커리어를 고민하고, 또 대학원에서 같이 과제도 많이 한 사이이며 항상 내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던 친구이기에 이런 류의 코멘트도 그저 받아들여지긴 했다.  


그런데 요즘 비슷한 말을 다양한 경로에서 많이 듣는 걸 보니, 확실히 뭔가 달라지긴 달라졌나 싶다. 다만 내 언어실력 자체는 아마 비슷했을 텐데... 그저 소통하기가 좀 더 쉬운 사람이 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전과 지금의 언어실력 자체는 같다고 가정했을 때 소통을 더 어렵게 하고 가로막는 장애물은 언어 그 자체이기보다는 상대방과 나 사이에 느껴지는 심리적인 거리감,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 부족에너지레벨 같은 것들이다.


처음 영어를 주로 쓰며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 혹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그저 대화를 하고 있긴 하지만 피상적인 레벨이 그쳤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한국에서만 살던 내가 이곳에 와서 대화하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그 방식을 몰랐고, 대화를 이루는 핵심 콘텐츠들에서 문화적인 갭이 많이 느껴졌었다. 이런 게 바로 문화 차이랄까? 한국에서도 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대화를 주도하던 편이었는데 (네, 저는 ENFP입니다) 이곳에서 영어를 잘 못해도 그 성향은 어디 안 가서 늘 토픽을 던지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던지는 토픽 자체가 듣는 사람 입장에선 정말 생소하거나, 이해를 못 하는 것들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국인의 관점으로 세계의 여러 현상을 바라보던 나의 대화주제는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그들과의 대화에서 '흠, 흥미롭네.' 같은 일차원적 반응 이외에 더 많은 대화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30년간 살며 당연하다 느꼈던 것을 토픽으로 던지고 이야기했을 때 어느 하나 스무스하게 이해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져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도통 감을 못 잡는 경우가 많기도 했다.


어느 사회처음 진입해서 New comer가 되면 그 사회에서 선호하는 것, 통용되는 가치, 문화적 차이 같은 걸 받아들이기 위해 일단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보를 수집하고 봐야 한다. 지금 발론티어하는 기관에서도 내가 New comer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고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직 나도 적응 단계에 속한 사람임을 늘 깨닫고 New comer 집단을 대변하려고 한다.) 그걸 모르면 대화를 하고 사회에 속하게 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민감한 문화적 가치들은 걸러서 대화해야 하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문화를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비교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 차이와 문화적 가치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경험이 요구된다. 그래서 지금의 나도 언어 자체가 비약적으로 늘었다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방식이 조금 세련되게 바뀐 것에 가깝다.


그걸 위해 지금껏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오피스 잡을 버리고 대학생 이후 10년 만에 고객 서비스 직군에서 파트타임을 하기도 했었다. 이 사회의 공감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하나씩 나오는 경제 신문을 읽은 지도 일 년이 넘어가고 - 매주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신문을 집어 들고 읽는 사람이 되기는 했다. 일주일에 한번 글을 쓰는 것으로도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들이 내 정체성을 말해주니깐. 무언가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다 경험이다' 생각하고 지원했다. 호주 방송국 프로그램에 방청객으로 참여하고 오디언스 리스트에 참여하는 중 이기도 하다. (SBS Australia - Insight <Soul Mate> 편 참고)

그러면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전처럼 공감대를 갖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살아간다는 감각은 이곳에서의 삶에 에너지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며 배우고 느끼며 나의 세계를 더욱더 확장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내가 해야 할 것은 계속해서 마음을 열고 늘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같은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 친구들에게만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주제들을 여기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심도 있게 이야기하면서 그전에 생각 못했던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가기도 했다.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들과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최대의 고민거리, 정말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까지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이 먼저 오픈해서 이야기해 준 바람에 국제결혼과 시월드, 심리상담, 직장 내 은근한 인종차별과 유리천장, 국적별 성향등... 오히려 한국에서는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주제들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비슷한 문화권에서 생각하는 사고의 흐름이 아닌, 아예 다른 방법으로 사고하는 흐름으로 내 상황을 바라보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물 반컵을 보고도 물이 이만큼이나 남았네, 하는 것처럼 이 상황을 달리 보면 언제나 긍정할 요소가 숨어있어서 이 부족함과 불안전함이 오히려 더 나아갈 기회를 의미하게도 했다. 다 완성되고 충분히 갖춘 삶을 살 거였다면 이곳에 와서 시작했을 리 없는데. 그날그날을 살다 보면 그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얼마나 값진 가치인지 가끔 잊는다.


이제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그래도 긴장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에너지레벨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더 이상 '생존'을 생각해야 하는 자의식 과잉의 단계를 넘어섰다. 잔잔한 행복들이 가득한 일상에 진심과 노력이라는 키워드를 심어 두고 그저 이렇게 살아나가는 삶, 그 시간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에서 내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까지 걸린 시간은 이곳에 익숙해지기까지 걸린 시간과 같다. 그 시간이 오래 걸렸으면 오래 걸릴수록 나는 아직도 갇힌 세계에 침잠해 있었을지 모른다.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도 여기서 만난 친구들은 나와는 다르다고,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마음에 빗장을 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를 꽁꽁 걸어 잠그고 있었겠지. 누구와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곳에 있어도 그냥 닫힌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우리를 설명하는 것은 국적, 성별, 직업이 아니라 우리가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며 살아갈 것인가.
내게는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와 그 퀄리티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내 삶을 사랑하고 싶다면 더더욱 그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무엇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해 주는 지표 같았다.


서로에게 진심이고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로 일상을 채우고 그 어떤 경우에도 마음과 따로 노는, 겉도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것. 이건 타지에서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세운 원칙이기도 한데 - 사실 서른이 넘으면 다들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운데 굳이 가식적인 관계의 사람들과 겉도는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일하느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굳이 내 시간과 에너지를 그런 관계에 쓰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나 또한 내가 닦아놓은 모든 터전을 뒤로하고 이곳에 왔을 때, 나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찐 관계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한 두 명만 있어도 살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곳에서 살기가 행복해질 거라는 걸 알았. 내게 이곳에 뿌리내리고 산다는 것은 나를 알고 서로를 응원하는 존재들이 가득하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이곳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만나려면 먼저 용기를 내야 한다. 도전 없는 성취는 없듯, 첫 스텝을 내디뎌야 하는데 그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먼저 새로운 곳에 나를 던지고 새로운 사람을 편견 없이 만나 이야기 나누고, 마음을 열어볼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빗장을 열고 터놓기 시작할 때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바뀌고 나누고 있는 콘텐츠의 질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게 되면 우리는 그 시간을 아주 가치 있게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최근에 여러 친구들과 또 지인들과 참 많은 대화를 했고, 그 온도와 밀도가 아주 높았다. 그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거리들을 넘어서 마음에 얽혀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파헤치며 공감대를 확장했다. 마음속에 층층이 닫혀있는 빗장을 열어나갈 때 우리가 얼마나 깊이 이야기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었는지를 기억한다. 그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난 뒤에 정신적 에너지가 고양되었고, 삶에 만족도가 높아졌다. '이런 건 나눌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묻어두던 주제들마저 꺼내고 나누었을 때 더 큰 부분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면서 공감하는 수준이 달라고, 그 관계의 질이 달라졌다.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경험들을 공유하는 순간, 우리의 세계가 만나게 되고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번 만났던 세계는 아무리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법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세계관을 확장하고 더욱 두텁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완성시키는 일만큼이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각자의 세계를 공유했던 이들이 비록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더라도 '그곳에 내가 애정하는 누군가가 있어'라는 생각만으로 든든하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이 아닐까.





다음 편에서도 계속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더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