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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Jul 25. 2018

34. 오래전 살던 집을 찾아서

회상 (2)

기억을 거슬러 찾아간 창원은 곳곳이 현수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거나 먼 곳을 응시하며 다부진 표정을 지은 사람들의 사진이 가는 곳마다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현 시장은 당적을 버리면서까지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삼원색을 달지 못하고 핫핑크색을 배정받아 본의 아니게 도시를 더욱 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통합으로 이룬 창원, 광역시로 완성하자'는 슬로건이 눈에 띄어서 그간 달라진 창원의 위상을 알려주었다. 내 기억 속 창원은 아담하고 단정한 곳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적지 않은 공장이 있었지만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런 풍경이 잘 들어오진 않았다. 내겐 어디까지나 이곳저곳에 공백이 많은 적당히 조용한 동네였다. 예전에 살던 양곡동으로 향하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양곡동이 더 이상 양곡동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가족을 태운 차는 삼십 년 전 그 동네에 가까워져 갔다. 동네 입구에 있던 작은 예배당은 이제 웅장한 교회가 되어 차 안에서 고개를 꺾고 이마에 주름이 잡힐 정도 눈을 치켜뜨지 않으면 교회 벽면에 붙은 이름조차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차는 숨을 죽이고 좁은 길로 진입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양곡동을 관통하는 길은 여전히 하나였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그야말로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예전 동네가 너무 달라졌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은 별안간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여기 봐봐 이 상가 그대로 있네, 그래 이 아파트 생각난다 하나도 안 변하고 옛날이랑 똑같네. 누가 먼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 중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고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한 양곡동은 다행히도 누군가는 발전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획일화라 부를만한 과정을 많이 겪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감탄하고 안도하는 사이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도착지에 다다랐음을 알려주었다. '양곡상가아파트'. 꿈속에 수도 없이 등장했던, 일곱 살의 나와 삼십 대의 부모님이 살던 그곳이 눈 앞에 나타났다. 


당시 어린 나에게도 꽤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아파트였다. 어릴 때에도 나는 지은 지 20년 정도 된 아파트에 살고 있어 라고 생각했었다. 외벽도 회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그런 느낌에 확신을 더했던 것 같다. 이름도 양곡상가아파트. 지금은 주상복합이라는 말끔한 명칭이 있지만, 당시의 상가아파트는 지금의 주상복합이 주는 느낌과는 다른, 굳이 말하자면 정반대 부류의 정감이 있는 아파트였다. 물론 그때의 나는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일층에 슈퍼가 있는 것이 정말 좋았다. 아무튼 그런 아파트가 그대로 있었다. 아니 칠을 다시 해서 그런지 내 기억 속의 아파트보다 더 새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파트 측면에 쓰인 '나'라는 글자가 요즘 아파트에서는 보기 힘든 둥글둥글한 모양새로 쓰여있어서 아파트의 나이를 어렴풋이 가늠케 했다. 그렇다. 양곡상가아파트는 가나다라 동이 있는 단출한 아파트로, 우리 가족은 이제 막 '나' 동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면서 어머니와 나는 우리가 이 아파트의 11층에 살았었다는 데 어렵지 않게 합의했다. 그리고 입구의 경비실이며 우편함이며 엘리베이터 옆으로 난 층계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하다며 함께 반가워했다. 엘리베이터는 우리 가족 세 명과 주민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을 태우고 11층으로 향했다. 고작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이 이렇게 가슴 뛰는 일일 수 있을까 싶었다. 11층에 내리며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어릴 적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엘리베이터 앞 빈 공간을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긴 복도가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왼쪽 복도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는 데에도 어머니와 나는 이견이 없었다. 아버지는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중에 얘기해 보니 아버지는 내가 그때 어떻게 아무 연고도 없는 창원으로 간다는 결정을 그리 쉽게 내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이 집은 당시 미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귀국을 결심하고 얻은 첫 보금자리였다. 우리 세 식구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함께 살기 시작한 곳이 이제 막 눈 앞에 다시 나타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그러더니 가운데 어느 한 집 앞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나도 조심스레 따라갔다. 탁 트인 복도 옆으로 보이는 광경은 예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 같았다.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그대로였지만 그 앞으로 새로 들어선 아파트 몇 동이 보였다. 그나마 그것이 산등성이를 가릴 정도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앞서 가던 어머니는 "이상하다 예전에 니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저 오른쪽 밑에 있었는데 자리를 옮겼나 보네. 지금은 바로 요 앞에 있네." 하고 말했다. 나는 학교가 자리를 옮겼을 리가 없다며 원래 저기 있었다고 우겼다. 복도 한가운데 집에 이르러 그 집 현관문과 창문과 외벽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맘 같아서는 초인종이라도 눌러보고 싶었지만 혹 오해를 받을까 싶어 그 앞에 마냥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니 층계가 있었다. 어머니는 "니 기억나나 니 여기 계단에서 맨날 아래층 친구하고 놀고 그랬잖아"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새삼 오르락내리락하던 그 공간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빛바랜 바닥 타일도 금이 간 벽면도 모두 예전 그대로인 것 같아 잠시 그곳에 서서 몇 번 셔터를 눌렀다. 


이제 돌아가야지 하고 다시 복도로 돌아왔을 때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그 가운데 집 현관문이 열렸다. 한 중년의 부부와 아이들이 나왔다. 혹시 우리 때문인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부부는 복도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쐬는 듯했다. 어떻게 하지 말이라도 걸어볼까 생각하며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미 부부와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 옛날에 이 집 살았거든요. 우리 아들이 한번 와 보고 싶다 해서 찾아왔어요." 나는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이미 나도 모르게 그 집 앞에 와서 "제가 여기 25년 전쯤 살았거든요." 하고 거들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마치 이 집주인이라도 되는냥 묻지도 않은 말을 자랑스럽게 내뱉었다. 아내로 보이는 진짜 집주인 분은 뜻밖에도 "아이고 그렇게 오랜만에 찾아오셨으면 함 들어가 보셔야지."라고 말하며 선뜻 문을 열어주셨다. 그 말에 염치도 없이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관에 서서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가급적 나는 사생활을 침해하려는 게 아니고 단지 집 구조만 보고 있는 겁니다 하는 인상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곧 석연치 않은 구석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분명 부엌이 오른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왼쪽에 있었다. 당시 학교 숙제로 설거지 돕기가 있어서 생애 첫 설거지를 이 집에서 했기 때문에 부엌의 위치 정도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이 집 구조가 다 바꼈네. 옛날에는 부엌이 저 오른쪽 안에 있었는데."라며 내 기억에 동조했다. 집주인은 "이상하다. 내가 여기 사는 동안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머니와 나는 우리는 그보다 훨씬 전에 여기 살았었다며 그건 무려 1990년 무렵의 일이라며 논란을 마무리했다. 어쨌든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고 발길을 돌려 집에서 나왔다. 이 정도면 아쉬운 대로 추억을 하나 더 만든 셈이다 싶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낮의 더위가 한풀 꺾였는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어머니는 니 학교 가던 길 기억나냐며 옛날에 무거운 가방 메고 가다가 넘어져서 니 엄청 울던 거 생각난다고 했다.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인데 말이다. 어머니는 그 기억이 강렬했는지 몇 번이고 아파트 앞 길을 걸어가며 그 얘길 했다. 아버지는 예전에 우리 동 앞에 삼성연수원 건물이 조그맣게 하나 있었는데 안 보이네 하며 그 건물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그것 또한 내 기억에는 없었다. 나는 "여기 콩콩(트램펄린)이 크게 있었잖아요. 50원씩 내고 타고 그랬는데 기억나죠?"하고 되물었지만 부모님은 전혀 동의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무튼 각자의 기억을 음미하며 혼란스러워하던 차에, 그 혼란의 종지부를 찍는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름 아닌 양곡상가아파트 '라'동이었다. 우리 셋은 모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순간 우리가 살던 곳은 '나'동이 아닌 '라'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 구조가 바꼈네 이랬네 저랬네 하며 남의 집까지 버젓이 들어가 행패(?)를 부렸건만. 이윽고 주체할 수 없는 민망함이 몰려왔다. 라동 11층에 올라가 보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국민학교는 어머니의 기억대로 저 오른쪽 끝에 보였고, 아버지가 기억하던 연수원은 라동 바로 앞 정면에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서 복도를 걸었다. 그 집 앞에 섰을 때 이 집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정하기 힘든 익숙함이 있었다. 어머니는 집 앞을 둘러보더니 "그래, 이 집 맞네. 어쩐지 아까 거기는 집이 좀 작아 보인다 했어." 하셨다. 그리고 아까 본 집과 별 다를 것 없는 그 집을 향해 한 마디 더 덧붙이셨다. "이 집은 부티가 나네. 이 집 확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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