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을 읽고
‘이상하게 나는 나이를 먹는 게 싫지가 않다. 남들의 시선을 덜 의식하게 되고 뭔가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착각인가. 부디 좋은 것들로만 채워야 할 텐데’
2018년 새해를 맞이하며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나이를 먹는 게 싫지가 않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 때마다 끊임없는 불안과 잡생각에서 적어도 한 뼘씩은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좋다. (지금도 여전히 생각이 많지만..) 포기할 건 포기하고 취할 건 취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서 또 좋다. (지금도 여전히 욕심이 많지만..) 이렇게 무게중심을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찰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야. 착각하지 마. 아직 게임은 시작도 안 했어’ 라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저승사자처럼 내게 다가왔다.
‘에브리맨’은 죽음에 관한 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남자가 일생에 걸쳐 점점 죽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책이다. 주인공의 장례식을 첫 장면으로, 그리고 그의 유년시절로 돌아가 다시 죽음까지의 이야기가 쭉 이어진다. 챕터로 나뉘어 있지도 않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단 한 번의 호흡에 거침없이 날 것으로 풀어헤쳐진다. 그 가운데 그는 통념적으로 죽음과는 연관성이 떨어져 보이는 어린 시절부터 매 순간 죽음을 목격하고 또 한편으로는 직접 근접해간다. 병원 옆 침대 소년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죽을 뻔했던 몇 차례의 수술들, 친구와 직장 동료의 죽음. 이는 시기와 장소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항상 죽음에 근접해있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생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사로잡혀 있던 그가 죽음 앞에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점점 소멸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 또한 숨 막힌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생에 대한 갈망이, 지난 삶에 대한 기억이 죽음 앞에선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런 죽음들이 이 세상엔 흔하고 흔해 빠졌다는 것이 너무 거대해서.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번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중략)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 빠졌다는 점이었다."
이 죽음의 이야기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노년이 된 그가 주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면서 쏟아내는 독백이었다. 그는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불륜을 저지르면서 세 번의 결혼 생활을 파탄 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 죄책감을 느끼긴 했지만 자존심을 꺾지 않았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탓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를 지극히 아끼고 보살피던 친형까지도 자기와는 다르게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거리를 두게 되었다.
“랜디와 로니는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자신의 행동을 그들에게 해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는 여러 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때는 둘 다 너무 젊고 분노가 강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고 분노가 강해 이해 못했다. 사실 이해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이내 죽음 앞에서, 생의 끝자락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과오에 대해서 직시하고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울부짖는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이미 늦어버린 것이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껍데기가 쪼그라들고 나서야 진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집과 끝없는 욕심, 이기심으로 망쳐버린 수많은 순간과 관계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를 심판하기 시작했고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부상과 부모의 이혼으로 힘들어하는 딸에게 그가 어쩔 수 없다며,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만이 진실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일생을 부정하는 것을 과연 누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딸에게 건넸던 그 말마저 죽음 이후 그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소설의 첫 장면, 그의 장례식에서 딸은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이 대목은 우리는 절대 우리의 지난 삶, 행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책임져야 할 순간이 반드시 돌아온다(죽음과 함께)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그’로만 서술된다. 그리고 ‘에브리맨’이라는 제목처럼 특정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나도 당연히 죽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인공처럼 여러 차례의 수술로 생명을 연장하다 끝내 죽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지난날들을 곱씹으면서 천천히 스미는 죽음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도 나는 똑같이 절망에 휩싸이고 똑같이 흔들리고 똑같이 울부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덜 흔들리고 싶다. 덜 슬프고 싶다. 덜 절망적이고 덜 울부짖고 싶다. 최근에 봤던 영화 중에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인생의 한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상실을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에브리맨’의 ‘그’와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가 죽음과 상실에 대하는 자세는 차이가 있다. 나탈리도 엄마의 죽음, 남편의 외도, 아끼던 제자로부터의 부정,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찾아온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절망한다. 화창한 날 지나가는 버스에서 눈물을 흘리고, 침대에서 베개를 부여잡고 남몰래 오열한다. 하지만 이내 곧 그녀는 꿋꿋이 다시 인생을 걸어간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버텨낸다. 그녀가 ‘그’와 다르게 덜 흔들리고 덜 절망적일 수 있던 이유는 끊임없이 사유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철학과 교수인 그녀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있었다. 오랜 시간 인생의 많은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굳건한 내면을 쌓아왔던 사람이었다. 매 순간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과 판단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 질문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유가 지속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내면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을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탈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건강하고 굳건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끊임없이 사유하고 고민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쌓아가고 싶다. 그래서 죽음에 근접한 순간에 충분히 절망하고 충분히 흔들리고 난 후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잘’ 죽고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많은 미련과 후회를 안게 되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잘’ 죽고 싶다.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 에선 죽은 사람들이 7일간 천국으로 가기 전, 중간역에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고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행복했던 기억을 고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되었던 기억을 고르기도 한다. 만약 그런 곳이 실재하여 내가 정말로 그 중간역을 거치게 된다면, 오랜 시간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져가고 싶은 추억이 많아서 쉽게 결정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잘’ 죽고 싶다.
..근데 이렇게 욕심쟁이라서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