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고
요즘 회사에서 업무 매뉴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이사님이 밥 한 번 먹자고 했고, 거부권이 없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삼겹살 정도 생각하고 갔는데 웬걸 소고기집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단순한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고, 아무 생각 없이 소고기 한 판을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이사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 넌 이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듯, 말문을 여셨다.
“23일에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는데, 그전까지 매뉴얼을 완성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정말 미안한데.. 토요일에 나와줬으면 좋겠어ㅎㅎ”
난 무릎을 탁 쳤다. ‘아 역시 세상에 순수함은 없구나, 순수한 소고기는 없구나’,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순간, 이미 소고기는 내 몸의 일부가 되었기에 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하여 난 4월 13일 금요일에 회사 행사인 ‘야간산보’에 타의로 참가하여, 퇴근 후 밤 11시까지 구로에서 당산까지 16km를 걸었고, 4월 14일 토요일 오전 9시에 절뚝이며 회사에 출근하여 오후 4시까지 매뉴얼 작업을 하다가, 4월 15일 일요일 지금 북큐의 마지막 독서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으며 이 독후감을 쓰고 있다.
책의 저자인 버트런드 러셀 씨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다면 분명히 격노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쓴 지 80년이나 지났는데 세상은 그대로라니! 이 바보 같은 것들!’ 러셀 씨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더 심해졌을 수도 있다.
경쟁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은 방향성을 상실한 채, 단순히 속도전에만 피치를 올리고 있다. 우리들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그리고 우리들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돈을 벌고 성과를 내는 것 이외의 ‘무용한’ 것에는 한눈팔지 않도록 채찍질을 하고 있다.
실용적인 지식이 기술의 발달과 경제적 성장,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들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부여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특히 한국은 이런 외형적 성장을 거듭할수록, 청년은 더욱 힘들어지고, 세대 간의 격차는 심해지고, 자살률은 13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인생을 운영하는 감독이 맞다면, 이쯤 되면 경기의 흐름을 끊고 작전타임을 가져봐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게으름’, 정확히 말하자면 ‘사색하며 쉬는 시간’을 형편없는 것으로 취급해왔다. 성과를 내고 성공해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에 대해서 낭비라고 생각하고, 그런 시간을 누리는 사람들을 백수라 칭하며 따가운 시선을 던져왔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렇다고 우리가 그다지 형편이 넉넉해진 것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반대로 그런 시간들을 제대로 가져본 적 없이, 성과와 돈에만 목매달았기에 끊임없이 불행하고, 월요일이 싫고, 직장이 싫고, 네가 싫고, 내가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시회에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인상 깊은 노래의 구절과 영화의 장면을 곱씹어 보기 위해 되감아 듣고, 보기를 반복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생에는 ‘일시정지’ 버튼이나 ‘되감기’ 버튼이 없다. 단 한 번의 멈춤이나 반복 없이 시간의 흐름에 맞게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더더욱 ‘게으름’이 필요하다. 우리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잘 꾸려나가기 위해서.
모두에게 충분한 ‘게으름’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게으름’의 시간 동안,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아픈 곳은 없는지, 지금 내 라이프스타일에 문제점은 없는지, 내가 하는 일에 정말로 만족하는지, 친구와 가족 간의 관계에 있어 아쉬웠던 부분은 없는지, 주변 사람들 중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이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도덕책에나 나올법한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 당연한 것들조차 지키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린 이미 충분히 사는 대로 생각하는데 길들여진 것 같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눈 옆을 가리고 쉼 없이 질주하다 쓰러지는 경주마처럼 몸과 마음이 모두 타버리고 없어질 것이다. 우리... 이제는 조금 쉬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 물론 내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경주마이기에 내일도 직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태어난 죗값을 치러야 한다.
p.s.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비롯해 종교, 교육, 사회주의 등 15가지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글로 엮어놓은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챕터가 제일 와 닿았고, 다른 챕터들은 조금은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비슷한 내용으로 한병철 씨의 '피로사회'라는 책도 추천드립니다. 현대 철학서인데 이해하기도 쉽고 얇아서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독후감 업로드되어 있으니 한 번 읽어보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