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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Jan 05. 2023

변화에 대한 뻘글

20230105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렵게는' 변한다고 난 말을 항상 했었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타인의 서사는 내가 알 수 없으니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것을 돌이켜보면 그랬었으니까. 어렵게나마 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개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장 먼저 필요한 건, 개인이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그 각오의 순간. 이 순간은 생각보다 더 어려울 수 있어. 사람은 보통 자기가 사는 방식이 '옳다'라고 느끼고 싶어 하니까. 나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현재의 내가 못난 부분이 있는 존재라는 걸 까발리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activation energy는 가장 높은 장벽이라고 할 수 있지. 엄청난 장벽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극단적으로 하루아침에 결심이 서는 것은 아니야. 엄밀히 그것은 오히려 변화의 시작점은 아니라고 생각해. 너도 알다시피 하루아침의 극단적인 무언가는 도박의 세계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러니까, 변화의 다짐은 아주 약간 불편한 경험의 작은 뭉치에서 시작해서, 그 아주 작은 비슷한 경험들이 반복되며 점차 커져, snowball effect 같달까. 


그 에너지 장벽을 한번 넘어서고 나서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야. 오히려 이건 조금 쉬운 편에 속하는데, '시간'이라는 내 노력과는 상관없는 영역이기 때문이야.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인데 그 시간 동안 내 다짐과 각오에 매일 물을 주고 보살펴주면 돼. 꾸준한 성실함으로 물을 주고 보살피는 것은 나름 할 만한 일이잖아? 물론, 나같이 성격이 참 급한 타입에게는 이 항목도 꽤 어려울 수 있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무언가 변화해야 하나, 의구심이 들 거야.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그 어떤 것들 또한 필연적으로 생기지. 맞아. 굳이 바뀔 필요는 없지. 그런 변화의 욕구가 들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그거 자체로 타고난 축복이니까. 하지만, 그 축복이 없는 것 또한 축복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변화'라는 욕구를 느끼는 것 자체로도, 그러니까 무언가를 '원한다'라는 것은 하루하루에 동기부여를 줄 테고 그것은 삶을 보다 덜 권태롭게 할 테니까. 권태와 욕망 중 한 가지로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욕망이 더 축복이라고 생각해, 나는. 아무튼, 어떤 변화에 대한 욕구가 내 '인생 경영'의 아이템으로 한 번 들어온 순간,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아보려고 해. 그리고 어려운 것이 늘 그렇듯이, 한 번 성취를 하고 나면 내가 처음에 원했던 딱 그것만 얻게 되는 것은 아니더라. 그로 인해 딸려오는 부수적인 것들 중에 오히려 본 목표보다 만족스러운 것이 꽤 있다고나 할까. 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불가능하리라 생각한 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 되어있는데, 초반에 그토록 괴로웠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오히려 이제는 평온해. 당연해졌어. 내 정체성이 되어버린 거지. 더 이상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안 그러는 게 이제는 더 힘든 상태가 된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지금, 아니 요즈음. 인생 경영을 하던 중, 새로운 아이템 하나가 올라왔어. 지금이 벌써 1월이니까 벌써 여섯 달 정도 됐네. 미세한 작은 경험이 시작이 되어 그에 대한 비슷한 경험들이 달라붙고 있는 중이야. 달라붙는다는 표현보다는 이 주제에 조금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져서 남들이라면 지나칠 만한 상황도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보게 된다는 게 더욱 적합할 것 같네. 눈덩이가 조금 더 커지는 것 같은데, 괜히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불어나는 속도를 애써 막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아이템. 하지만 납기는 없으니 찬찬히 눈여겨보고 있어. 


이전까지는 애써 무시했어. 회피하고 싶었거든. 혼자서 하는 건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건데, 타인이 개입되면 내가 통제할 수가 없잖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무력한 사람이 되는 그 기분, 그게 참 무섭고 두려웠던 것 같아. 자신이 없었어. 나는 그런 유전자를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거든. 나에게는 프로그래밍되지 않았으니 불가능 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애써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눈감고 다닌 것 같아.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희망이 싹트는 순간 또한 '유전자'로부터였어. 나에게 없다고 생각한 그 모습을 나와 그 '유전자'를 공유한 타인이 너무나 당연하게 가지고 있더라고. 너무 태연하게. 저 사람이 그렇다면, 나에게도 어쩌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사실 내가 잘못 믿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거였어. 내가 나라고 믿어왔던 어떤 모습에 의심을 품게 됐다는 거. "나는 사실 그것을 원해왔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전까진 "난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아"라고 말해왔는데, 어쩌면, 그 말이 본질적 진심이 아니었던걸 수 있겠다, 하는 자기 정체성에의 균열. 추구했다가 괜히 너무 힘들까 봐, 안 될까 봐, 상처가 될까 봐, 원하지 않는다고 자기기만을 해왔던 것은 아닐까. 나를 너무 잘 속인 탓에 내가 거기에 깜빡 속아서 꽤 오랜 시간을 세뇌되어 왔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내가 설정 한 내 프레임에 갇혀서 그걸 유지하겠다고 자존심을 부렸던 것은 아닐까. 이런 균열의 틈을 타고 '변화'의 시작점에 들어간 것 같아. 이렇게 된 이상, 예전처럼 외면하지 않고 마주해 볼게. 조급한 마음이 들지만, 꾸준히 물을 줘 가면서 잘 키워볼게. 


어떤 것이 좋은 것을 알기 때문에 원하는 것과, 모르기 때문에 원하는 것. 이 둘 중에 뭐가 더 낫다고 생각해? 아니, 더 낫고 말고 하는 문제는 아닐 거야. 그렇지? 하지만, 한 가지는 난 확신이 들어. 후자의 것은 매우 강력할 것이라고.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어. 그리고 믿어야 할 단 하나도. 그것만 잊지마. 그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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