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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Nov 12. 2021

현실적 문제가 위로가 될 때

목표 (20211112)

  현실 이야기는 답답하다. 오죽하면 귀신이 무서울 땐 내 앞날을 생각하라고 그러면 내 미래가 더 무서워서 귀신 따위는 무섭지 않을 거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앞으로 내 커리어는, 내 미래는, 내 노후는….. N포 세대에 여기 한 명 추가요. 이런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과거에 사로잡혀있으면 우울,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다 보면 불안이 온다고, 그래서 당장 오늘,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이 이 시대의 바이블처럼 자꾸 떠도는 걸 보면, 비단 그렇게 앞날의 현실에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현재 박사 과정 마무리를 앞두고 졸업 프로세스 중에 있다. 한국에서는 졸업 프로세스라 하면, 2주에서 4주간 약 백 페이지짜리 졸업논문을 작성하고, 나의 졸업을 심사할 교수님들을 알아보고, 그들이 오케이 하면 날짜를 조율해서 하루를 잡고, 그들을 모두 모이게 한 후에 40분간의 디펜스 발표와 10분 남짓의 질의응답을 하면 끝난다. 이것은 대략 한 달, 최대한으로 해도 두 달 안에 모든 프로세스가 완료된다. 하지만 명불허전 느려 터진 독일. 독일의 졸업 프로세스 시스템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물론 학교 마다도 다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2주-3주면 다 썼을 졸업논문이 세 달 정도가 걸렸다. 이것은 아직도 진짜 이유를 모르겠다. 내 효율이 낮다고 하기에는 보통 학생들이 모두 3달 정도 잡고 작성하고, 그렇다고 여기 분위기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온전히 혼자서 작업하는 일인데 분위기를 탈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린 지는 아직도 진짜로 모르겠다. 이렇게 거진 세 달 작업한 졸업논문을 매달 말의 정해진 데드라인에 각종 서류와 함께 제출한다. 그리고 약 2주 후에, 졸업위원회가 열리고, 거기에서 나의 졸업 심사 과정을 시작할지 탈락시킬지를 회의한다. 그러니까 2주나 기다렸지만, 이 단계에서 나의 졸업 프로세스는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이다… 그 회의에서 탈락하지 않았다면, 나는 (문자도, 이메일도 전화도 아닌) 도이체 포스트 ‘우편’으로 나의 졸업논문 심사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레터를 받게 된다. 21세기기에 ,,아무튼 그렇게 심사과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내 졸업논문을 심사할 교수님들께 내 졸업논문을 보내고, 그들이 꼼꼼히 읽어보고 리뷰, 혹은 비판을 비로소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최소 8주가 걸린다. 그러니까 두세 달 후에 너의 심사가 끝났고, 너의 디펜스 날짜는 언제이다’라는 또 다른 레터를 우편으로 받을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졸업 프로세스를 시작한 지 대략 6개월 정도가 지나야 비로소 졸업장을 품에 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초 채용 프로세스를 할 때, 나는 내 졸업에서도 피해 갈 수 없는 독일의 느린 프로세스를 간과했고, 회사에 올해 9월에 입사를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었다. 하지만, 졸업은 커녕 앞으로 6개월이 걸릴 졸업 프로세스를 9월에 시작할 수 있을 뿐이었고 당연히 나는 입사일을 미뤘다. 그게 지금이다. 현재 내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거의 세 달이 흘러가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충분히 주는 데는 디펜스 발표를 준비하고 그 내용을 충실히 열심히 공부하라는 배려가 담겨 있을 것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다.. 안 그러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에 비난만 하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나의 경우 그저 잡생각만 많아지는 시간이다. 디펜스 발표 날짜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동기부여도 안 되고, 내가 학계 대신 취직을 할 것을 내 슈퍼바이저들은 알기 때문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나와는 시작하지 않아서 새로운 실험을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시간이 많을 때의 잡생각이라는 것은 보통 부정적인 곳을 향한다. 제출했다는 해방감의 약 3주를 제외하면, 최근 두어 달을 나는 남들과의 비교 혹은 디펜스 발표에 대한 걱정으로 보냈다. ‘나와 비슷하게 박사과정을 시작한 저 독일 애는 이미 가지고 있는 논문이 몇 개인데, 나는 고작 이거밖에 못했네. 나는 졸업할 자격이나 있는 걸까. 내가 내 졸업 분야에 대해서 뭘 알고 있기는 한 걸까. 내가 이렇게 멍청하고 한심한 것을 내 논문 심사하는 교수님들이 알고, 내 졸업을 무효화시키는 그런 전례 없는 사건이 나에게는 일어날 것만 같아.’ 이곳에서 디펜스 발표는 발표 시간은 고작 30분인데, 질의응답이 최소 한 시간 ~ 한 시간 반이다. 그리고 그때에 나오는 질문들은 독일 사람들 특유의 깊고 철저하고 근본적인 물음이 주를 이룬다. 제 아무리 똑똑한 학생이어도 대답하기 굉장히 근본적이고 난감한 질문들.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다. 게다가 그걸 영어로 해야 한다니...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인데, 영어로 설명을 못해서 모르는 것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교수님들이 질문하는 내용이 뭔지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다른 사람들도 와서 구경할 텐데, 한 시간 반 동안 내가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떡하지. 내 멍청함을 들키면 어떡하지’

  생각, 멈춰!라고 외치고 다른 일에 집중하면 해결될 것이지만, 의무적으로 해야 할 무언가도 없는 현재 상황이기에 그냥 이런 부정적 생각의 악순환에 저항 없이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마치 내 디펜스 발표, 내 졸업으로 나의 나머지 인생이 결정이 될 것만 같은 부담감에 사로잡힌다.


  오늘 아침, 커피타임에 애들은 연금 이야기를 했다. 유럽 애들에게 유럽 연금에 대한 견해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고, 복지 왕국인 유럽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야기 한 애들이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국적으로 비교적 복지에 진심이지 않은 나라들이라서 그런가) 베이비붐은 많고, 그들의 수명은 길어지고, 연금은 바닥나고, 젊은 사람들은 없고, 젊은 세대 은퇴 나이는 길어지고 우리가 은퇴해도 연금 돈이 남아있을지 불투명하고 등등 걱정하는 주제가 내 또래의 우리나라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신기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유럽연합 국가들별로 연금 수령 연령이 다른데, 그걸 노리고 빨리 연금 받으려고 은퇴 즈음에 여기저기 나라를 바꾸는 얌체족도 많다고 한다.

  현실 이야기는 막막하고 답답하기는 하지만, 당장 몇 주 후에 있을 졸업에 대한 걱정을 지나치게 하는 나에게는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까 60대 70대, 80대의 이야기를 하니까 현재 내 상황이 굉장히 작아 보이고 초연해진다. 그때에 막막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 졸업이 뭣이 중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마치 ‘오늘 망하고 우울해도 괜찮아. 내일은 더 망하고 더 우울할 거니까.’ 하는 그런 달관한 사람의 태도. 졸업을 기다리는 학생이기 이전에, 여기에서 세금내고있는 그래서 연금 걱정도 해야하는 한명의 개인으로서 새삼 나를 인지한다고나할까. (그리고 나는 귀국하면 여태 독일에 낸 연금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결정해야한다...)그리고 오늘 연금 이야기를 함께 한 직장 동료들은 현재 나와 같은 연구소에서 비슷한 목표를 향해 연구 수행을 해 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중에는 내가 비교를 하며 내가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들도 있었는데, 그들 또한 모두 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모를 전우애가 들었다. 그들의 실적과 상관 없이 미래에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노후 보장 제도는 우리가 계속 풀어나가야 할 과제니까. 한편으로는 못난 합리화, 정당화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에 조금은 위로가 되는 걸 보면 나한테 필요했던 것은 옆 상대와의 비교가 그다지 큰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마음, 졸업 발표가 여생에 영향을 끼칠만큼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는 조금 내려놓는 태도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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