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선우 2시간전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할머니

불행한 가족들은 저마다의 슬픔이 있다.

22년 만에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재개발 이슈에 발맞춰 남편은 주택 재개발 조합장 출마를 앞두고 있었다. 출마 첫 번째 자격은 주소지에서 1년 이상 실거주한 주민이었다. 부랴부랴 월세를 줬던 세입자를 내보내고 주소지를 옮겼다.

남편과 내가 주소지를 옮겼지만, 실거주는 나 혼자 하게 되었다. 이미 장성한 아들은 홀로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고, 나이 드신 시어머님을 나가서 생활하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명분으로 때아닌 싱글라이프를 즐기게 된 것이다.

가구 없이 단출한 살림이지만 홀로 수행하듯 작은 집을 매일 쓸고 닦았다. 그러나 이 좋은 공간의 딱 하나 흠이 있었으니, 방음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자려고 누우면 옆집 남자의 고함이 우렁차게 들렸다.

"아유 시발아! 가만 좀 있으라고! 시발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욕을 하는 것을 보니 나이 어린 자녀를 혼내나?‘

"아우 시발아! 왜 약 먹어? 왜 안 먹냐고!"

또 고함을 치신다. 만약 나이 어린 아들이면 저 정도 꾸중이면 울음소리도 새어 나올 만한데 남자의 고함소리만 들릴 뿐.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어유 이게 뭔 소리야? 이거 소음이 너무 심하니 내일은 찾아가서 문을 두들기며 항의를 해볼 참이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또 옆집 소리가 들린다.

"아유 시발아! 돌아누워 시발아!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 시발아!"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여러 가지 못된 상상력이 엉뚱한 19 소설을 머릿속으로 써가다가 그다음 단어에서 상상의 나래를 멈췄다.

"아유 시발아. 똥을 다 뭉개놨어."

'아… 치매 노인을 모시고 사는구나?‘

요양보호사 자격을 힘들게 땄던 내게, 실버인지 전문가 자격증이 있는 나한테는 치매 노인을 요양한다는 것은 보호자에게 극에 달하는 육체적 노동이자 정신적 피로감이 엄청난 일이라 이해가 갔다. 노인이 학대받고 있을까 봐 며칠 동안 옆집 벽에다 귀를 쫑긋 세워 댔다. 폭력을 쓰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도 노인을 때리지는 않는 듯했다. 다만 아들임이 분명한 남자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계속 이름처럼 "시발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욕설에 충격을 받았지만, 점차 그의 고통을 담은 절규처럼 들려왔다.

얼마나 고되면… 요양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도저히 케어가 안 되는 상태라는 등급 판정을 받아야 요양원 입소가 가능해진다. 오죽하면 요양원 입소를 '현대판 고려장'이라 표현하겠는가?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옆집 할머니를 두고 많은 생각에 잠긴다.

이젠 돌아가신 우리 아빠는 한쪽 다리가 없으신 장애인이었다. 돌아가시기 7년 전쯤 되실 때는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 투석을 하셔야 했다. 병원비며 수술비는 뭉텅뭉텅 빠져나갔고 빠듯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오빠와 언니는 너무 많은 병원비 부담에 배우자들과 줄줄이 이혼했다.

병자 한 명이 10년을 앓으니 온 집안이 연속으로 흔들리며 붕괴가 됐다. 그 안에서 엄마는 차마 자식 볼 면목이 없어 죄인처럼 눈치 보며 돈을 보태 달라는 말을 꺼내야 했다. 엄마는 우리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식물인간처럼 누워 지내시는 아빠의 대소변을 7년이나 받아내셨다. 엄마도 너무 힘들어 도망가고 싶으셨을 텐데, 어쩜 옆집 남자처럼 아빠 가슴을 치며 자식들 고생 그만 시키고 제발 죽으라고 고함을 치진 않으셨을까? 그 후 세월이 흘러 요양원에서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을 만큼 나도, 우리 가족들도 마음이 퍽퍽해져 있었다.

또 옆집 남자의 고함이 들린다. 이젠 그 소리가 버릇없고 싸가지 밥 말아먹은 불량 아들의 목소리가 아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가장의 비명 같아 가슴이 아린다.

우리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80세를 훨씬 넘긴 고령자이시다. 이것은 과거 상처와 부담에서 잠시 벗어났던 내게 외며느리로서 무겁게 다가오는 현실이기도 하다. 나도 어쩌면 옆집 남자와 같은 상황에 부닥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어떻게 하면 어른들을 존중하면서도 나와 가족의 삶의 질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나의 새로운 숙제가 되었다.

또 옆집 남자의 고함이 빌라를 울린다. 누구든 층간 소음으로 항의할 만도 한 이 상황을 조용한 침묵으로 외면하는 것은 옆집 남자를 이해하고도 해줄 게 없는 이웃들이 층간 소음에 대한 항의조차 미안한 암묵적인 배려가 아니었을까? 빌라가 떠나가게 울리는 남자의 시발아에 숨죽인 듯 고요한 침묵이 오늘은 너무 와닿는다. 옆집 남자의 처절한 고통에 비해 우리가 견디는 소음은 언젠가는 끝날 기약이 있는 작은 고통임을 알기에...


작가의 이전글 검은 눈물을 닦은 기적의 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