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선우 Oct 02. 2024

추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무료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산악회에 들었다. 하지만 산꼭대기 위에서 얼큰하게 취해 계신 아저씨들을 보는 게 곤혹스러웠다. 열심히 운동해서 뺀 열량을 술로 채우는 회원들의 모습이 별로였다. 걷기 동호회로 옮겼다. 산악회와는 달리 젊은 사람들도 꽤 있고 무엇보다 활기차고 좋았다. 몇 번의 걷기 모임도 가고, 후기도 써주며 꽤 열혈 활동을 하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러 갔다. 올레길도 15일 이상 홀로 걷다 보니 무료해졌다. 걷기 동호회 번개 공지란에 혹 제주도 올레길 걷는 분 계시면 같이 걷자고 공지를 올리니 마침 자기도 근처 7코스 걸을 예정이라며 흔쾌히 만나자는 채팅이 왔다. 다음날 7코스에서 만난 사람은 내 또래의 남자였다. 난 당연히 올레길을 걷는 내 또래의 아줌마를 상상했고 상대 역시 올레길을 겁도 없이 15일 이상 홀로 걷는 사람이 당연히 남자일 거로 생각하고 나왔단다. 뻘쭘하고 어색했지만, 그냥 걸었다. 걷다 보니 상대에겐 올레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아픈 사연이 있었다. 회사에서 나가라는 소리보다 더한 대기발령 상태였고 법무팀에서 건설 파트라는 황당한 직무이동으로 자존심도 상했지만, 관둘 수도 없다는 이야길 들으며 마음으로 위로를 보내고 있었다. 제주도의 풍광 탓이었을까? 올레길 동행으로 의지한 탓일까? 어쩌면 기대보다 꽤 괜찮은 외모 탓이었을까? 약간 설렜다. 하나 그게 다였다. 종료 지점에서 서로 잘 가라 손 흔들며 헤어졌고 정말 그게 다였다. 그3개월 후 전화를 걸어오기 전까지는. 3개월 만에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다. 경황없이 헤어진 게 미안했다고 했다. 7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식사 한번 안 한 것이 맘에 걸렸다며 퇴근 후 밥을 먹자고 청했다.이게 뭔 일이지? 조금은 당황했고, 조금은 설레었다. 그를 만나러 가며 전시장에 비친 내 모습을 몇 번이나 점검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고, 과하지 않게 립스틱도 발랐다가 조금 지웠다가. 그러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뭐래. 너 유부녀다! 정신을 차려! 무슨 맘이 먹었길래 이래?’ 그냥 그랬다. 꼭 뭔 맘을 가져야 설레나? 그럴 수도 있지.

약속 장소로 갔다. 기억보다 그는 키가 더 컸고 더 젊었다. 도대체 올레길에서 힘든 그를 얼마나 위로해 주고 깊은 대화를 나눠 줬길래 밥까지 사준다고 하는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로의 근황을 말하다, 최근 내 친구 여류화가와 북촌 한옥 부티크 호텔에서 묵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가 훅 치고 들어왔다.

“왜 화가님만 그렇게 좋은 곳에 재워 주세요? 저도 재워 주세요!”

어? 이 사람 뭐라는 거야? 지가 지금 무슨 말을 한 줄 아는 건가? 농담인 척 흘려들으려고 “아~ 네 다음에 기회 되면 방 잡아 드릴 테니 혼자 주무시고 가세요 호호호” 웃으며 얼버무렸건만, 상대는 정확하게 내 눈을 보며 도전적인 미소를 띠며 한마디 했다. “혼자서는 안 가요”.

침묵이 흘렀다. 허허 이 사람 농담이 아니었다.명백한 추파였다.잠깐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야 내가 엄청 가벼운 사람처럼 보였던가? 아닌 저 사람이 미친 건가? 누가 봐도 별 매력 없는 아줌마인 나한테 왜 이러는 거?

저녁 자리로 잡은 삼겹살집 고기 굽는 냄새와 소주 몇 잔에 얼큰해진 상대의 붉은 얼굴과 고기 불판 너머로 넘실넘실 넘어오는 남자의 스킨로션 냄새가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아~ 이 위기를 넘어가야 한다. 동호회 활동이 어색하지 않게, 상대가 불쾌하지 않게, 혹 내가 잘못 해석한 거라면 농담처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어~ 고마워요.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추파예요 하하하 아직도 제 외모가 죽지 않았군요. 여자로 봐주셔서, 하하하 그럼 제가 살 빼고 올 테니 썸은 3개월 후에 타보죠! 하핫”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다 자리를 파했다.

농담처럼 그 순간을 뭉개고 돌아오면서 어디서 헤퍼 보였나 나를 자책하다가 저 밑에서 그래도 여자라고, 잠시 콩닥거렸던 내 맘이 부끄러웠다. 그래. 나이 50에도 여자라고 실없는 농담에 설렜었어. 바보 같이. 그러면서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두들겨 댔다. 이놈의 주름이라니.

돌아오는 버스 안.

정신이 차려졌는지 거절의 문자를 시로 보낸다.

내 진심을 담아,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을 담아, 그에게 잠시 설렜던 나의 애틋함을 담아.

제목: 씨앗


키워 보지 않겠냐며

누군가 씨앗을 건넸다.

가끔 기웃거렸던 남의 집 담장

화사하게 웃음 짓는 장미.

씨앗과 꽃 번갈아 보며

키울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긴다.

게을러 물 주는 것 잊을까 봐

먼지 낀 이파리 닦는 법 잊을까 봐

적당한 날 햇볕 쬐어주는 걸 잊을까 봐

화분 둘 공간도

화분 볼 시간도 없는 난,

남의 집 담장 밖 화사하게

드리운 가지 끝 장미로 족하다.

손바닥 위 씨앗 채 그냥 두련다.

지나다 보는 담장 안 장미는 주인님 사랑으로 핀 꽃.

나도 누군가의 담장 안 화사한 꽃일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