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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이사 Aug 31. 2020

그대, 비와 함께 천천히 돌아오라

영화 '호우시절'을 보고



목소리만으로 누군가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는 건, 분명 그 사람을 오래도록 생각했단 뜻일 테다. 사천으로 출장을 왔다가 두보 초당에 들른 동하(정우성)는 사라진 동료를 찾아 대나무길 사이를 헤매던 중, 우연히 유학 시절 마음을 나눴던 메이(고원원)를 만나게 된다. 안내원이 되어 마이크를 든 그녀의 목소리가 동하를 이끌었다.



허진호 감독의 다른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한석규)과는 달리, 호우시절의 동하는 어떤 확신에 찬 것 같은 모습으로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선다.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하는 ‘언제 본국으로 돌아가느냐’는 메이의 물음에 ‘언제까지 있을까?’라며 능글맞게 반문한다. 마치 둘 사이에 어떤 관계의 공백이 없는 것 마냥 행동한다. 어쩌면 동하는 메이를 다시 만난 순간, 운명을 되찾은 거라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서로 마음이 있었던 거 아니냐며, 키스도 했었다는 둥 여지로 꽉 찬 말들을 곧잘 내뱉는다. 공항에 내려 회사 사람을 만났을 때의 굳은 모습이나, 두보 초당에서 종업원을 찾아 나설 때 보여줬던 어리숙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지나간 저편의 관계를 돌이켜 오늘의 이편에 갖다 붙이려 하는 품이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다. 운명을 데려다준 봄 날씨에 설레고, 운명으로 다가온 사람 앞에서 하염없이 들뜬다.



한편 메이는 어딘가 주저하는 것 같다. 다가서는 동하의 관심에 장난스럽게 받아치다가도, 어느 순간 말이 없어지곤 한다. 공백이다. 동하가 보지 못하는 마음의 거리가, 그녀에겐 있다. 동하와 시내로 나가기 전 메이가 대나무 그늘 아래서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긴 모습은 호우시절이란 영화를 가장 잘 꿰뚫고 있는 장면 중 하나다.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메이와 동하는 결코 같은 온도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것 말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메이가 광장에서 춤추는 사람들 틈새로 들어가 홀로 춤을 출 때, 관객들만 볼 수 있는 그녀의 얼굴엔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난다. 두 남녀가 같은 마음으로 설레고 즐거웠을 거라면, 아마 카메라는 남녀의 표정을 따로 비추는 신을 넣진 않았을 것이다. 동하가 자신에게 손 내밀다 엉겁결에 다른 할머니와 춤추게 되는 걸 보면서도 메이는 웃지만, 웃음이 오래가지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메이의 뒷모습을 비춘다. 분명 중심엔 동하와 할머니가 있고, 메이의 뒷모습은 아웃포커스 된 채인데, 보이지 않는 메이의 표정이 더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주저하다가도 메이는 결국 동하를 만나러 나왔고, 동하와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메이가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벽을 넘어 공백을 좁혀가려 했을 때, 마침 비가 온다.


 ‘호우(지)시절이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말이라고, 메이가 읊는다. 비를 피해 선 가게 앞에서 둘은 좀 더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메이가 왜 자기가 보낸 편지들에 답하지 않았냐고 하자, 동하는 처음엔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시간이 생겼을 땐 여자 친구가 생겨서 답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국은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과거에 둘이 함께할 수 없었던 건, 동하의 의지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답을 들은 메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동하는 ‘내가 처음부터 널 사랑했단 걸 증명해 보이면, 바뀌는 게 있을까?’ 묻는다. 힘든 마음, 아쉬운 마음, 후회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의 말과 표정에 다 담겼지만 너무 늦은 걸까. 메이는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 아니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란 뜻 모를 답을 남기고, 뜻 모를 눈물을 흘리다 떠난다. 내일 떠나게 될 동하와, 배웅하지 못할 메이 사이엔 어떠한 약속도 남지 않았다.



그래도 반전이 남아있다. 동하가 ‘오는 중’이라고 했던 지난 사랑의, 기억의 증거인 유학 시절의 사진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동하가 메이를 재회한 뒤로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여러 번 독촉해 받은, 지금은 충분한 ‘의지’의 산물이었다. 사진을 받은 메이가 공항으로 달려가고, 동하가 메이에게 다시 한번 ‘하루 더 있다 갈까?’ 물으면서 둘은 또 다른 하루를 함께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동물원에 가서 사천의 명물인 판다도 보고, 한국 식당도 간다. 평범한 데이트 코스, 느린 템포 속에서 둘 사이의 공백이 조금씩 어 드는가 할 즈음, 갑자기 메이가 ‘나 결혼했어.’ 라며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그러고 보면 메이의 망설이던 모습들이 다 설명되는 것 같다. 갑자기 생겨버린 관계의 싱크홀 앞에선 동하도 멈추고 만다. 그렇다면 대체 왜 메이는 동하를 잡고, 그에게 의지하려 했던 걸까.


알고 보니 메이는 1년 전 쓰촨 지진으로 남편을 잃은 상태였다. 동하도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일단은 서울로 돌아간다. 퇴원한 메이는 남편의 기일을 챙기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자전거를 1년 전부터 타지 못하게 된 이유, 동하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겠대도 배우기를 거절했던 이유, 무엇보다 다가오는 동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지 못했던 이유. 그건 바로 떠난 사람을 여전히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잃고서도 그 사람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일상은 어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일상이 이어간다는 게 상실을 극복했단 것과 같은 말은 아니다. 상실을 겪은 사람에겐 상대와 함께했던 기억이 부는 바람처럼 쉬이 들었다 간다. 그리고 바람이 들었다 가면, 파도처럼 그리움이 잇따라 밀려와 삶을 다 쓸어가 버리기도 한다.



나는 과연 당신의 부재에 충분히 무뎌진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일상의 풍경 속에서, 달라진 거리와 시간과 사람들 속에서마저 문득문득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떠오른다. 여전히 내게 걸리는 당신을 어떻게 잊어낼 수 있는 걸까, 잊는다는 게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런 고민들이 영화 내내 메이의 표정에 힘겨움을 더했으리라.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 아니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하는 말은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게도 들린다. ‘당신이 와서 아픔을 극복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아픔을 극복하면서 당신이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전자라면 잊어야 할 사람에게, 후자라면 아직 온전히 사랑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오늘의 혼란스러운 나는 어느 편에게든 미안할 테다. 메이는 그런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었던 거다.


아직 계절이 바뀌지 않은 것 같은 때, 그러니까 동하가 떠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때. 서울에서 두보초당으로 자전거 하나가 배달돼 온다. 서울에 비가 많이 내리는 걸 보니 청두에서 비가 옮겨온 것 같다며,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편지도 함께.


동하가 과연 메이의 운명일까. 손을 놓았던 과거를 보면 아닌 것 같은데, 우연히 만나 마주 본 오늘은 또 그런 것도 같고. 미래는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동하가 그녀를 놓지 않고 있단 거다. 그는 메이가 포기하려 했던 ‘때’들을 곁에서 함께 맞아주었고, 견뎌주었다.


한 사람은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한 사람은 다시 시작해보기 위해서, 끈을 놓지 않은 채 다가오는 시절에 몸을 맡기고 있다. 때론 밀려나고, 때론 상처 입고, 종종 그만두고 싶을 때라도. 시절을 알아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그건 두 연인에게 시절을 기꺼이 견뎌내려는 의지가 있느냐는 게 아닐까.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를 맞았던 두 사람, 그리고 다시 올 비를 기다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아보는 메이의 걸음. 영화는 다시 두보 초당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하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반팔을 입은 걸 보니, 울렁이던 봄을 지내고 시원한 여름이 온 모양이다. 대나무 그늘 아래서 고민하던 메이의 모습에선 동하가 안 보였는데, 오늘 홀로 선 동하의 모습에선 메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다.


대나무 숲을 거슬러 다가오는, 호우시절.

영화는 말한다. 그대, 때에 맞는 비와 함께 내게로 천천히 돌아오라고.



마침 오늘 창밖에서도 비가 내리고 있다.

영화에서 내리던 비가 당신의 삶 속에도 스며들기를 바란다.



춘야희우 春夜喜雨 - 두보 杜甫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그 때를 알고 내리니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봄이 되어 내리네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이 밤 바람 따라 몰래 들어와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고 있네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들길에는 구름이 드리워 어둑하고
江船火燭明 (강선화촉명) 강 위에는 조각배 등불만 외로이 떠있네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새벽이 되어 붉게 반짝이는 곳을 보니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금관성(청두)이 온통 꽃으로 물들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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