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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inee Oct 22. 2021

독립 프로젝트 제안서

Part 2. 스물~스물아홉: 노잼 라이프 청산기 5

과장님이 휙 던져준 부동산 매물 링크가 폭탄의 불씨가 되었다. 그동안 한 번도 집을 나가서 산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마치 '오늘 점심은 짬뽕!'처럼 세상 쉽게 말해주는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정말 별게 아닌 듯 느껴졌다. 그래, 내 공간을 꾸리는 거야.


마음은 쉽게 먹었건만 막상 부모님께 얘기하려니 고구마 3천 개쯤 먹은 것처럼 답답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당연히 "안된다"고 하시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편도 한 시간. 출퇴근하다가 죽을 것 같아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하기엔 애매한 거리다. 이놈의 집구석, 못살겠어! 박차고 나가기엔 몹시 평화로운 가족이다. 그야말로 독립을 위한 독립이었다.


독립을 위한 독립. 없는 명분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우선 수중의 돈을 영혼까지 끌어 모았다. 막연히 '입사 후 3년 후에는 누구라도 만나서 결혼하지 않을까'해서 모았던 돈이 때마침 만기 시점이었다. 이렇게 온 우주가 힘을 모아 '이제 독립할 때'라고 착착 밀어주는 건가? 대출을 받는 걸 감안하면 전세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대충 예산을 정하고 밤마다 침대에 누워 직방, 다방을 들락거렸다.


틈틈이 모은 정보를 끌어 모아 점심시간 짬짬이 <독립 프로젝트 제안서>를 작성했다. 표지에 아주 큰 글씨로 '최혜인 독립 프로젝트 제안서'라고 썼다. 제안 배경, 자금 마련 계획, 장소 선정 기준, 향후 예상 일정 순으로 내용을 채웠다. 그동안 수많은 제안서와 기획안을 작성했지만 그 어떤 제안서보다 간절했다. 프로젝트가 성사되기를 이토록 온 마음으로 바랐던 적이 있었나.


과장님이 마음에 불을 지펴준 덕분에 <독립 프로젝트 제안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하니, 과장님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 최 대리가 아직 순진하네. 부모님에게 미리 얘기하면 될 것도 안 돼요. 일단 가계약금 걸어놓고, 계약 파기하면 손해라고 밀고 나가야 한다니까요.


맞다.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립하겠습니다"를 외치면 "오냐,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거라" 하실 부모님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렇다고 선 계약 후 통보로 나가고 싶진 않았다. 그건 독립이라기보다 (나쁜 의미의) 가출 같은 모양새다. 싫다! 부모님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이 점점 더 커질수록 더 꼼꼼히 제안서를 작성했다. 다섯 장도 채 되지 않는 제안서를 완성하는데 꼬박 한 달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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