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를 떠나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렌터카를 이용했다. 니스 코트다쥐르 공항에서 차를 픽업해 처음 시동을 걸던 순간, 우리가 나눈 감상평은 황당하게도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는 거였다. 애인도 나도 외국에서의 운전은 처음이라 내내 걱정이 앞선 터였다. 서툰 영어로 차를 제대로 픽업할 수 있을까, 시동을 켤 수나 있을까(?),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경쾌한 엔진소리를 듣는 순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이거.. 별거 아니구나!
감도가 높은 푸조 차는 아주 부드럽게 미끄러졌고, 그 차를 타고 알아볼 수 없는 안내판이 달린 뻥 뚫린 길을 달리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자유로운 느낌을 줬다. 시간과 공간에서 해방되는 느낌, 말하자면 그랬다. 둘이서 멀리 도망이라도 온 것 같았달까. 영 눈에 들어오지 않던 옆에 달린 신호등도 생각보다 빨리 적응됐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그저 액셀을 밟는 일이었다. 이토록 낯선 길을 우리가 달리고 있어.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어!
이 차를 타고 우리는 숙소가 있는 아비뇽을 중심으로 근처의 소도시를 돌아다녔다. 옥색 물빛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베르동 협곡,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를 보기 위해 간 아를, 절벽 위에 쌓아 올려진 중세 마을 고흐드.. 가로등이 없는 남부의 밤은 너무 깜깜했고그래서 우리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처럼 달리고 또 달리고 걷고 또 걸었다.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익숙해지기에 남부의 소도시들은 낯선 아름다움 그 자체여서평범한 골목 하나하나를 걷다가도 끊임없이 탄성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아비뇽 성벽과 가르교
거기에는 시간이 있었다. 14세기에 지어진 교황청이라던지 2000년도 더 전에 로마인들이 세운 다리라던지, 가늠도 안 되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고 서 있는 건축물들이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듯이. 터무니없게도 오래된 건축물들을 보고 있으면 다른 공간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 속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그러는 동안 출국 전까지만 해도 나를 괴롭게 한 고민들은 아주 작은 점처럼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시간의 소용돌이를 돌고 돌아 지금 손을 맞잡고 있는 옆 사람이 더 특별하게도 느껴졌다.
프랑스 남부 여행의 마지막 날, 묵었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려는데 바로 옆집에 사는 호스트 필립이 우리를 배웅해 준다며 찾아왔다. 첫날에도 그는 직접 마중까지 나와 우리를 환대해 줬고 가볼 만한 선데이 마켓이나 아름다운 프로방스 소도시를 소개해주는 호의도 베풀어줬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밖에 못 하는 남부 토박이 할아버지였지만 서툰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동원해 나눈 대화는 아직까지도 살갑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숙소를 나서기 전, 필립은 우리에게 "Bon voyage!"를 외치며 한 마디의 인사를 보탰다. "또 만나요, 어쩌면!" 돌고 돌아 우리가 필립과 다시 만나는 그날이 올까.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뒤에 두고 온 듯 아른거렸던 옥색 투명한 물빛, 따뜻한 노란빛을 띠던 골목과 단단하게 서있던 성벽 같은 것들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날에도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여행이 얼마나 멋졌는지마법 같았는지 서툰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설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