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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Sep 30. 2024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보고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를 보기 시작했다. 잘 알려졌듯 스타 셰프인 '백수저' 그룹과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재야의 고수 '흑수저' 그룹이 요리 대결을 펼치는 컨셉. 큰 뼈대가 그룹 간 경쟁인 만큼 특정 그룹에 대한 선호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내 경우에는 흑수저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다. 수저계급론을 떠올리게 하는 네이밍이나 초반 흑백수저 셰프들이 등장하는 방식의 극명한 대조를 지켜보면서 강한 언더독 효과를 느낀 듯하다. (흑수저 셰프들은 예정에 없던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처럼 어리숙한 표정을 한 채 어수선하게 등장하고, 백수저 셰프들은 그들보다 한 층 위에서 밝은 조명을 받으 한꺼번에 솟아오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가는 출연자는 급식 대가 셰프님이다. 친근한 인상에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 팀전에서 묵묵하게 맡은 일을 하는 책임감,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재료를 손질하는 내공, 한국인의 가슴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손맛'까지... 이미 셰프님의 팬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온갖 커뮤니티에 입덕 계기를 조목조목 늘어놨지만 나는 뭐랄까, 직업인으로서 그녀가 쌓아 올린 시간들을 상상하게 되면서다. 그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이 대단하게 느껴져 적은 분량이 못내 아쉽고 서운한 지경으로 셰프님을 응원하게 됐다.


급식 대가 이미영 셰프님은 15년 동안 경남 양산의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하셨다고 한다. 15년. 입맛 까다로운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밥을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을지,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지 고민하며 칼을 쥔 세월이다. 예산 탓에 재료에 한계가 많으셨을 텐데, 안 그래도 단체 급식 맛있게 하는 게 정말 어려우셨을 텐데, 고된 노동에 비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셨을 가능성이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 앞에서라면 어쩔 도리가 없이 존경심이 생긴다. 새우젓을 먹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수육에 매실청을 곁들이는 빛나는 센스가 셰프님이 보낸 15년의 세월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또 하나 흑백요리사의 감동적인 장면은 철가방 요리사님이 여경래 셰프님과의 대결에서 승리 후 큰절을 하는 장면. 난 여기서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질질 흘리고 말았다. (같은 철가방 출신이라며 대결을 받아준 레전드 선배를 이긴 후배가, 대결 후 선배에게 큰절을 한다고?? 이게 무협이 아니라 예능이라고??) 자신의 길을 앞서 걸어간 선배들에 대한, 그토록 정직한 존경심을 참 오랜만에 목도했기 때문이다. 일을 한다는 것. 일에 대해 어떤 성스러운 의식을 갖는다는 것. 요즘 세상에 좀 촌스럽게 느껴지는 몇 가지 들을 머릿속에 계속 떠올려봤다. 생활인이나 취향인으로 삶이 쪼그라들지 않도록 내 일을 귀하게 여기고 내 자리에서 후회 없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참 오랜만에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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