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밀을 나누던 열일곱의 어느 밤을 기억한다. 야자를 땡땡이치고 가로등 불빛조차 희미한 길을 모험하듯이 걷던 그 밤, K와 나는 어째서 이 시골 학교에 스스로 처박히게 됐는지에 대해 한탄하기 시작했다. 면학 분위기를 흐리는 조금의 소란에도 허벅지가 터지도록 매를 드는 선생님이 있던 학교. 벌써부터 우리를 질리게 만든 이곳으로 우리를 이끈 건 혹은 내몬 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말이다.
K도 나도 공부 잘한다는 이 학교가 이런 곳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희미할지언정 둘 다 느끼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는 것. 가족을 향한 때 이른 책임감에 성공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절박한 꿈처럼 품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 끝이 바로 여기라는 것. "네 마음을 알 것 같아." 처음 입밖에 꺼내본 말들이 스스로도 낯선데 그 애는 이해한다는 투로 답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한 마디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내 비밀을 누군가의 손에 기꺼이 쥐여주고는 "알 것 같다"는 한 마디를 듣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될지를 몰라 꺼내지 못했을 뿐이라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자기소개 게임이나 익명으로 연재하는 그림일기를 통해서만 홀로 앓아온 온 이야기를 털어놓는 까닭 또한 그럴 것이다. 소설의 초반부 기묘하게 그려지는 지우의 꿈, 그런 꿈같은 일들이 두려워서.
"지우는 뭔가 고민하다 손에 4B 연필을 쥐었다. 그러곤 오랜 시간 공들여 새를 그렸다. ... 그런데 얼마 뒤 한 남자가 다가와 그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기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 개를 참 잘 그렸네." (8쪽)
"지우는 제 속에 해소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았다. 강렬한 경험이지만 여전히 해석이 잘 안 되는 몇몇 기억 때문이었다. 지우는 그걸 이야기로 한번 풀어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직접 말했을 때보다 그림으로 그렸을 때 훼손되는 부분이 적은 어떤 마음을." (82쪽)
그날, 피부에 스치는 바람은 서늘하고 풀 벌레 소리는 가득 울리던 그 밤에, 내가 느낀 감정에도 성장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는 걸 책장을 덮고서야 안다. 그런 밤조차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고, 그 뒤로도 삶은 남지만, 소설의 표현을 빌려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 한" 말이다. 시험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아이들의 명단이 적힌 종이, 너무나 커다랗게만 보였던 그 한 장의 종이에 이름을 올리는 것보다도 더 넓게 자라나는 밤을 나는 그날 경험했던 것 같다.
작가님의 출간 간담회 중 좋아하는 구절을 덧붙인다.
"소설에는 성취 혹은 성공을 이루기보다 무언가 하지 않으려는 친구들, 무언가를 그만둔 아이들이 나옵니다. 무언가를 그만두는 과정에서 자기 이야기에 몰두하다 종래엔 타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내 고통만큼 다른 사람의 슬픔과 상처를 이해하는 과정을 더불어 그리고 싶었습니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물었을 때, 내가 더 커지거나 잘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와 그 사람들의 자리가 더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