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니까 대하구이 어떠세요?"
며칠 전에는 Y와 식사 약속을 잡으며 메뉴를 고민하는데 그가 먼저 이런 제안을 해왔다. 추석까지 이어지던 늦더위는 간데없고, 급격하게 쌀쌀해진 날씨에 '겨울이 오는 것 아닌가' 불만을 토로하던 어느 날이었다. 가을이 갈수록 짧아지는 탓에 이 계절을 마음껏 누리기도 전에 습관처럼 다가올 겨울부터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 내게 제철요리를 넌지시 제안하는 그의 말은 마치 어떤 제안처럼 다가왔다. "그런 걱정할 시간에 가을을 충분히 즐겨보자!"는. 대하구이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가을 제철 식재료라면 먹어주는 것이 이 계절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그렇다면, 네! 좋아요!
소금과 함께 노릇노릇 구워진 대하를 먹으면서 우리는 그간 밀렸던 수다를 떨었다. Y는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자다가도 깨는 일이 잦고, 그게 무엇이든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가끔 한다는 말을 소주잔을 기울이며 넌지시 했다. 회사에서 그가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소년 같은 구석이 있는 Y의 얼굴이 요즘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간다는 것도. 하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의 말을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문제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아직 가을의 대하구이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아직 행복이 무엇인지 잊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살이 통통하게 오른 제철 대하구이를 싹 비우고 약간의 산책을 한 우리는 기분 전환이나 하자며 칵테일 바에 들어갔다. 제철 과일인 무화과를 안주 삼아 몇 잔의 칵테일을 홀짝이며,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요즘에는 뭘 먹어도 그 맛이 그 맛이라고,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제철 음식을 챙겨 먹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가며 충실하게 기뻐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를 즐기면서 밤 산책을 많이 해둬야 한다고.
맞지, 우리의 삶과 무관하게 무관하게 계절은 아름답고, 새우는 살이 오르고, 무화과는 익지. 이런 변화에 무감각해지지 말고, 감사하며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일하다가 오느라 잔뜩 지쳤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Y의 눈빛은 다시 소년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