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끼니는 훌륭하다 13. 과일도시락
"엄마, 나 오늘 진짜 진짜 내가 뿌듯한 일이 있었어!"
딸은 급해보였다. 하교종과 함께 교실문을 튀어나와선 대뜸 이야기 보따리부터 푼다.
"엄마, 오늘도 아무도 나랑 안 놀아줬거든?"
가슴이 내려앉았다. 학교에 들어간 지 한 달 남짓. 아이는 내내 혼자라고 했다. 아침이면 바지만 20분을 입으며 침대로 파고들었던 것도, 졸립다며 멀쩡한 목소리로 잠투정을 한 것도 실은 그래서라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씩씩거리며 억지로 바지를 입혔다. 실컷 자놓고 꾀부린다며 아이를 탓한 것도 나였다. 몰랐다. 고작 6살. 이 작은 아이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점심도 혼자 먹었어. 아무도 나랑 안 먹어줬거든!"
내려앉은 가슴에 돌덩이가 올라앉았다. 이정도면 운석급이다. 왁자지껄 모두가 즐거웠던 교실에서 혼자 엎드린 채 종이 치기만을 기다렸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비만 유전자와 눈치없음은 쿨하게 물려줄 지언정 친구없음은 내 대에서 끊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내 딸이 학교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는다. 딸은 고작 6살이다.
"그래서 도시락 다 먹고 도서관에 갔어. 혼자!"
먹먹함에 그저 아이의 손만 매만지던 내게 아이는 쉴새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도서관에 갔다고 했다. 아이의 교실에서 서른 발자국 쯤 떨어진 도서관에 갔던 모양이다. 이렇게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가 엄마도, 선생님도 친구도 없이 혼자 쭈뼛주뼛. 그 길이 얼마나 길었을까.
"혼자 책도 읽고, 엄마한테 카드도 썼어! 볼래?"
아이는 글을 읽지 못한다. 쓰는 것도 고작 자기 이름, 엄마와 동생 이름이 다다. 다른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밥도 먹고 뛰어도 노는 동안 썰렁한 도서관에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운동장 쪽 창문에 포스터 따위가 잔뜩 붙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방음이 잘 되어 있었어야 할텐데. 몰려드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사이 아이는 제할말을 마치곤 가방을 열심히 뒤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엄마 보라색 제일 좋아하지? 선물이야!"
스스로 뿌듯했다고 했다.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고 엄마에게 카드도 쓴 자기가 뿌듯하다고. 며칠 전 책을 읽다 배운 표현이다. 기억난다. 아이는 '뿌듯하다'는 말의 뜻을 물었다. "뿌듯하단 건, 흠. 뭐랄까. 자랑스럽다는 뜻이야. 뭘 막 잘했을 때 스스로 칭찬해주는 말 같은거." 그림을 내미는 아이의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오늘은 혼자 있어도 괜찮았어. 내 스스로가 뿌듯했거든!"
"얘, 그냥 둘만 잘 키워. 자식키우는 건 가슴 시린 일이야."
작년 말 둘째를 낳고 행복에 겨워 셋째 타령을 하는 내게 엄만 저리 말씀하셨다. 남들은 부모가 낳으라 하고 자식이 싫다하는 세상인데 엄만 참 이상하다며 틱틱댔었다. 엄마의 그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혹독하게 외로웠던 사춘기 시절 하루가 멀다하고 문틈을 넘었을 내 울음에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시리셨을까. 엄마는 그 때의 엄마처럼 내가 내 자식으로 인해 지을 눈물이 싫으셨던 게다.
"엄만... 니들 오는 시간엔 덮어놓고 집에 있었어."
제일 싫었던 건 수학여행, 점심시간, 쉬는 시간. 차라리 시험기간이 좋았다. 그 며칠만은 쉬는 시간에도 다들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처럼.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하교종이 그렇게 반갑다. 그대로 집으로 달려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가로 누우면 엄마가 간식을 내오셨다. 두툼하게 썰어 튀긴 감자, 야채 듬뿍 올린 피자, 미끈한 삶은 계란 넣은 떡볶이 같은 녀석이 자동판매기처럼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열쇠를 가지고 다닌 기억은 없었다. 그게 우리 남매 키우며 엄마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라고 했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일, 행여 엄마 빈자리 느끼지 않게 하는 일. 그때의 엄마가 딸을 위해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일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넣어야 한다며 아이는 그림을 반으로 접는다. 아이는 집중하면 아랫입술을 살짝 무는 버릇이 있다. 그 입술을 보고 있자니 시린 가슴이 더워진다. 저렇게 아랫입술을 물고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으로 엄마를 그렸을 아이. 엄마가 이걸 받고 얼마나 좋아할까 혼자 웃기도 했을 것 같다. 아이는 내 생각보다 훨씬 씩씩했다. 서툴디 서툴지만 엄마 바짓가랑이 잡고 우는 대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런 뿌듯하고 멋진 아이에게 엄마의 눈물바람일랑 어울릴리 만무하다. 나도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했다.
"혼자 먹어도 얌냠쩝쩝. 맛있는 도시락을 싸줘야지."
아침마다 도시락을 싼다. 브로콜리나 오이, 파프리카 같은 맛없는 채소들이 단골이었다. 그걸 보며 입이 삐쭉 나온 딸에겐 먹기 싫어도 먹으라 당부하기도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시락을 쌀 시간이 됐다. 아이가 그려준 보라색 엄마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곤 채소칸 대신 과일칸을 뒤적였다. 키위, 감, 귤과 바나나를 골고루 깎았다.
아이는 유난히 과일을 좋아한다. 지난달인가. 앉은 자리에서 키위 6개를 먹은 적도 있었다. 오늘은 도시락을 열며 깜짝 놀라겠지. 오른손으론 키위 먹으며 왼손으론 감을 집어들겠지. 고사리손으로 귤껍질 까며 바나나를 오물거릴지도 모르겠다. 애니웨이, 아이는 오늘 점심 시간 쬐끔 더 행복할거다. 비록 혼자 먹는 도시락일지라도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가슴은 수없이 흔들리고 미어질 거다. 3살까지 이쁜 짓 저금해놨으니 남은 수십년은 그 저금 야금야금 빼쓰며 시린 가슴 부여잡아야 할 것 같다. 보라색 엄마 그림은 저금 증서 삼아 고이 접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시린 순간이 오면 꺼내보며 주문처럼 외워볼 생각이다.
"엄마도 지금, 여기서 엄마가 할 수 있는 걸 해볼게. 우리 딸처럼. 엄마의 엄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