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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포 Feb 22. 2020

지키지 못할 약속들

주말이라 고향집에 내려갔다. 회사 일 핑계, 건강 핑계, 아이 핑계 이렇게 각각 1주씩 미루고 나니 한 달 만이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200km, 약 3시간. 솔직히 멀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삼 남매 중에 가장 가까이 살고 있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손주 보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올해 다섯 살이 된 아이는,

잠꼬대로 “아빠, 강아지 다리는 4개”라고 내 귓속에 속삭이고 다시 잠들 때도 있다. 이런 귀염둥이 천사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튼 변변치 못한 내가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손주를 자주 보여드리는 일뿐이다.

야근 후 새벽이 돼서야 들어온 집사람과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깨우고, 부랴부랴 하루 묵을 짐을 챙겼다. 그리고 어김없이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하니 엄마가 마당 텃밭에서 파를 뽑고 계신다. 아이가 할머니~ 하고 뛰어가니, 엄마의 손주 맞이용 고정 멘트 “아이고~ 우리 강아지~”가 재생된다.


차려주신 늦은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가 올해 유치원에 입학하는 얘기까지 나오게 됐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일곱 살이 돼서야 유치원에 입학했는데, 요즘은 뭐든 참 빠르다.(하긴 맞벌이 부모덕에 걷기 전부터 어린이집을 다녔으니... 그러고 보면 우리 세대에는 엄마 품에 참 끈질기게도 오래 붙어 지냈다)


우리 강아지가 벌써 유치원을 가냐는 말씀을 하시던 엄마가, 뜬금없이 아이가 입학하는 유치원은 교복이 따로 있냐고 물으신다. 아니라는 며느리의 대답에 엄마는 힘주어 말씀하셨다.

“돈 줄 테니, 우리 강아지 꼬마 정장 한 벌 사 입혀라. 내가 우리 아들 어렸을 때 약속하고 못 사줬다.”


나는 속으로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삼십 년을 훌쩍 지난 얘기가 이렇게 소환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혼잣말처럼 그 약속이 내가 유치원 입학할 때였는지, 초등학교 입학할 때였는지 물으셨다. “유치원 입학할 때에요.” 단속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 나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뭐라고, 유년의 기억이라면 손가락 꼽을 정도만 겨우 기억하는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내심 부끄러워졌다. 잠시나마 감상에 빠질뻔한 내 유년의 잔재를 얼른 잡아채며, 뭐 그런 걸 기억하세요! 하고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하룻밤을 보내고 길이 막힌다를 핑계를 대며 이른 아침 다시 고향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아이와 함께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삼십 년 묵은 추억을 한뿌리 얻어먹은 효과는 대단했다.


삼십여 년 전,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걷고 있다. 우리 강아지 이제 유치원 가면 친구도 많고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따라 웃는다. 그러다 시장 한 편의 아동복 매장에 진열된 까만색 꼬마 정장과 빨간 나비넥타이가 내 눈에 들어온다. 그 시절 유명한 TV광고(나는요 정말 멋쟁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꼬마신사, 꼬~마 숙녀) 속에서만 봐오던 브랜드의 옷이다.


왠지 나는 그 옷을 입으면 새롭게 입학할 유치원이라는 곳에서 제일가는 꼬마신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엄마, 나 유치원 갈 때 저 옷 사줘.” 빠듯한 형편에 동네 슈퍼 앞을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그 흔한 새우깡 한 봉지 흔쾌히 사준적 없었던 엄마가 내 손을 이끌고 아동복 매장으로 들어선다. 처녀시절 재봉기술을 배웠던 손끝으로 원단의 질감부터 바느질의 마감까지 꼼꼼히 살펴본다. 그리고 이내 상의 안쪽에 달린 가격표를 열어본다. 육 만원. 1989년도의 육 만원.


다시 엄마의 손에 이끌러 아동복 매장을 나오던 그 순간부터 유치원 입학 전날까지, 매일을 끈질기게 했던 말, 엄마 나 꼬마 정장 사줄 거지?


삼십 년이 넘도록 못 사주고 기억해온 엄마의 마음이, 삼십 년이 넘도록 못 받고 기억해온 나의 마음이, 둘이 참 오랜만에도 만났다. 엄마, 그래도 우리 그때가 참 좋았지. 그치.


그나저나 아들과 추억 한뿌리를 사이좋게 나눠먹은 엄마는 그날 평소처럼 쉽게 잠들 수 있었을까?


한번 한다면 하는 엄마다. 본인 입으로 얘기를 꺼내셨으니 다음에 내려갈 때는 반드시 돈 십만 원을 며느리에게 내밀 분이다. 용돈을 드려도 모자랄 판에 받아야 하는 건지. 그것도 30년간 엄마의 마음속에 머물며 끈질기게 빚 독촉을 해온 이 불효자가, 기어코 어린 아들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복잡해진 마음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어둑어둑한 방 한편에 잠든 아이의 얼굴이 천사같이 빛났다. 우리 강아지가 벌써 유치원에 간다. 그래, 엄마가 주신 돈을 받아야지. 그리고 멋쟁이 꼬마 정장 한 벌을 사줘야지. 세상에서 제일가는 꼬마 신사로 만들어줘야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났다. 참 오랜만에 혼자 웃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요즘 들어 녹록지 않은 회사생활과 여러 걱정들에 다시 얼굴이 굳는다. 잊고 싶어 아이의 잠든 얼굴에 코를 대본다. 인형 같은 뽀송뽀송한 손도 한번 잡아본다. 그리고 속으로 혼자 말해본다.


"우리 강아지야, 나는 너에게 어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그리고 너는 내가 지키지 못할 수없이 많은 약속 중 어떤 것을 삼십 년이 넘도록 잊지 않고 살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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