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드포 Apr 28. 2020

오직 나만을 위해 쓰인 시詩

초보지만 부모라는 이유로 직장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심심찮게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아이는 어떤 의미인가?'라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 또래로 30~40대다. 예전 같으면 굳이 물을 필요 없이, 자신들도 한둘쯤은 낳아 기르며 직접 느꼈을 법 하지만 요즘 세상엔 그렇지 않다.


내 주변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을 주창한다.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나 역시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부모가 되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낳아보면 다르다는 것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아이는 나의 우주다', '신의 선물이다', '천사다' 등의 말들로 참 많이도 설득해봤다. 하지만 내가 그랬듯 누구나 부모가 되기 전에는 그 벅찬 감정을 실감할 수 없기에, 언제부턴가 그들에게 아이는 꼭 낳아야 한다는 설득을 그만두기에 이렀다.


설득을 포기한 후로는 아이가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질문을 받으면 이제는 오히려 내 더 궁금해진다. 두 말할 것 없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곁에서 아이를 볼 때, 떨어져 있을 때,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들춰보며, 추억이 된 전날의 일까지 하나씩 곱씹으며 생각해보지만 그 감정을 다 담아 표현할 길이 없다.


어느 여유로운 오후에 평소 외면했던 시집을 한 권 읽었다. 여러 시인의 대표작을 모아둔 시집을 통해 오래간만에 '시인이란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어떤 짧은 시는 삼십 초면 읽어 넘길 것을 한 삼십여분을 곱씹어 보게 만든다. 그것도 모자라 다음장의 새로운 시로 넘기지 못하고 잠시 책을 덮게 만들기도 다.


내가 그런 아름다운 시를 찾아내 읽고, 나름의 해석을 통해 어떤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벅차고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다 문득 아이는 나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다.


"나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 아이가 '오직 나만을 위해 쓰인 시'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글보다 시를 읽을 때는 사전을 많이 찾아보게 된다. 시인은 마치 어머니가 담가 보낸 김치통처럼, 세상의 소중한 의미를 잘 담가 한정된 단어의 틀에 꾹꾹 눌러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김치통을 열면 빨간 김치 한 포기마다 어머니의 얼굴과 고향집이 속속들이 배어있듯, 시인 역시 함축된 하나의 단어로 세상의 소중한 의미를 표현한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 존재는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결코 작지 않다. 부모를 향한 작은 표정과 제스처, 엉뚱한 한마디, 잠꼬대까지.


이제 다섯 살인 내 아이는 하는 말마다 새롭고 함축적이다. 때로는 세상에 한 번도 선보인적이 없는 외계어로 소통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 살펴보고 곱씹어보면, 뜻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 없다. 내 아이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미를 찾아 들여다보면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는 오직 부모라는 변변찮은 자격으로  아름다운 시를 내 곁에 두었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외우기도 벅찬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쓰인 시, 그 명작들을 매일 선물 받는다는 것. 때로는 세상에 찌든 내 곁에 두기가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하고, 두렵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상 최고의 유일한 시.


어둠 속에서 잠든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이를 위해 내가 꼭 필요하다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 아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두말할 것 없이 아이는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시.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모도 더러 있는 것 같다. 학대당하는 아이, 끔찍한 살해 뉴스. 나는 아이를 낳은 후로 그런 뉴스를 보면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린다. 내 아이를 통해 다른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순수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상상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다.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 오직 하나뿐인 그 특별한 시를 낙서로 여기며 던져버리는 사람들.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이 아이를 낳아 기르기 때문이다.


이제 곧 2020년의 5월 5일 다가온다. 어느새 우리는 어른이 되어 그토록 동경하고 바라던 '2020 원더키드'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만화와 같이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지구를 구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 만큼은 꼭 행복하게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100년 전 세계 최초로 어린이 인권선언문을 발표한 것이 바로 우리나라다.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를 더 이상 훼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켜 날이 갈수록 커지고, 뒷날에 큰 물결이 되어 출렁이기를 바라는 뜻으로 '소파(小波)'라는 호를 사용했던 방정환 선생. 그가 100년 전 어른들에게 당부했던 어린이날 선언문을 통해 다시 한번 돌아보며 꼭 다짐해봐야만 하겠다.


'오직 나만을 위해 쓰인 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지켜가야 하는지를.

 


 어린이날의 약속

- 1923. 5. 1 '어린이날 선언문' 중에서 -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다 같이 내일을 살리기 위하여 이 몇 가지를 실행합시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의 물건같이 여기지도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십시오.

어른은 뿌리라면 어린이는 싹입니다. 뿌리가 근본이라고 위에 올라앉아서 싹을 내리누르면 그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뿌리가 원칙상 그 싹을 위해야 그 나무는 뻗쳐 나갈 것입니다.


어린이를 결코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조선의 부모는 대개가 가정교육은 엄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그 자녀의 인생을 망쳐 놓습니다. 윽박지를 때마다 뻗어가는 어린이의 기운은 바짝바짝 줄어듭니다. 그렇게 길러 온 사람은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크게 자라서 뛰어난 인물이 못 되고 남에게 꿀리고 뒤지는 샌님이 되고 맙니다.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심심하게 기쁨 없이 자라는 것처럼 자라 가는 어린 사람에게 해로운 일이 또 없습니다. 항상 즐겁게 기쁘게 해 주어야 그 마음과 몸이 활짝 커 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 가며 기르십시오.

칭찬을 하면 주제넘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잘한 일에는 반드시 칭찬과 독려를 해 주어야 그 어린이의 용기와 자신하는 힘이 늘어 가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보십시오. 

집안의 어린이가 무엇을 즐기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나, 이런 것을 항상 주의해 보아 주십시오. 평상시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잘못된 뒤에 야단을 하거나 후회하는 것은 부모들의 큰 잘못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잡지를 자주 읽히십시오.

어린이에게는 되도록 다달이 나는 소년잡지를 읽히십시오. 그래야 생각이 넓고 커짐은 물론이요, 또한 부드럽고도 고상한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돈이나 과자를 사 주지 말고 반드시 잡지를 사 주도록 하십시오.


소파 방정환 선생


작가의 이전글 정말 고양이가 있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