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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Feb 25. 2024

사랑의 정의에 대한 토론

프랑스 남자친구와


어제는 남자친구와 사랑의 정의에 대한 토론을 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복잡해. 쉽게 말할 수 없어."

"재미없어.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무엇인지는 알면서 해야지."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한다.


"사랑의 형태는 대상에 따라 각각 다 달라. 어머니에 대한 사랑, 강아지에 대한 사랑, 그리고 너에 대한 사랑이 다르지. 어머니와 강아지에 대한 사랑은, 그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지는 않아."


"그럼, 내 옆에 다른 이성이 있을 땐 질투를 왜 느껴?"


"너를 잃을까 봐 하는 두려움이지. 사랑은 그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losing)이야. 어머니나 강아지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질투를 하지 않아."


"사랑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데, 그들은 너를 떠나지 않는데 왜 사랑하는 거야?"


"그들도 죽음으로 떠날 거잖아. 그게 두려워. 내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어떤 사람은 나에게서 사라지더라도 두렵지 않아.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실이 언제나 두렵지."


"그런데 사랑은, 죽음 뒤에도 지속되잖아.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들을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거라는 것이 확실한데? 너는 아니야?"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고 말하겠지. 너도 아마 네 엄마를 사랑‘했’다고 말할 거야."


"아니, 나는 그들의 사진을 보면서 '사랑해요'라고 말할 거야. 사랑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일 거고, 그건 과거형이 아니야."


"그건 사랑보다는 그리움의 감정일 거야."


"아니, 그리움보다는 훨씬 큰 감정일 건데. "



그가, 음, 하더니 동의한다. 그러더니 다른 말으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사랑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맞아. 내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아이에게 학교에서 곧장 집으로 오라고 말할 거야. 아이를 위험한 상황으로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


"그건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네 상실의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네. 이기적인 것 아니야?"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야. 배제할 수 없어."


"맞아. 나도 그랬어. 네가 너의 엑스의 가족들을 여전히 팔로잉하고 있었을 때 내가 화를 냈었잖아. 그건 이기적인 방식이었어. 그리고 그때 너와 논쟁하다가 깨달았어. 내가 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의 사랑을 하려 했구나. 그걸 깨달으니까 진심으로 자유로워졌어. 너에게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했잖아. 심지어 너의 엑스를 만나도 괜찮다고."


"그런 말은 하지 마. 네가 기분 나쁠 것을 그때 이해했어. 당연해. 오히려 네가 그렇게 신경쓴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잖아. 사랑하지 않으면 신경을 쓰지도 않겠지. 난 네가 기분 나쁘기 원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너를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아."



음, 그는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을 그 자신을 위해서일까. 그렇게도 소유욕이 없어 보였던 그에게도 연인 간의 사랑은 소유의 개념이었던 것일까?


"많은 연인으로서의 사랑은, 소유하는 개념의 사랑이 많은 것 같아. 질투하고, 통제하려 하는 것 말이야. 그리고 잃어버리기 무서워하는."


"응, 떠날 수 있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사랑이 될 수도 있지."


"만약에 내 마음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보장된다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내가 떠나지 않을 테니까?"


"여전히 너를 죽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겠지."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할 거야? 그 오랜 시간 동안?"


"오랫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겠지. 한 100년 동안. 그 이후 만약 다른 사람을 또 사랑하게 되어버리면 그를 떠나야 하겠지. 하지만 이전의 그를 사랑하는 건 변함없을 거야. 그가 행복하고, 아프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지."



그가 웃더니, 어쨌건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의 1:1의 사랑이 소유의 개념을 만든 것일까. (폴리 아모리의 개념도 있지만.) 연인이라는 자리는 다른 관계와는 달리 한 자리로 느껴진다. 그러나 일대일의 관계라고 해서 꼭 소유의 개념인 것만은 아니다. 이 사랑도 다른 관계에서의 양상과 같은 방식일 수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우리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어. 할머니는 좀 못되셨는데 말이야.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 많고, 며느리를 함부로 대했고. 그런 할머니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냥 품어주었어."


"응."


"뿐만 아니야. 손녀인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줬어. 내가 무엇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나여서. 며느리도, 아들들도, 그의 엄마도 그런 방식으로 사랑했어.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셨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유한 게 아니라 존재 자체로 기뻐해주셨어."


"그는 나이가 있잖아."


"아마 젊으셨을 때도 그러셨을 거야. 그뿐 아니야. 그는 자신의 소멸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삶의 마지막 즈음, 시한부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늘 웃고 계셨어. 삶에 집착이 없어보였어. 비슷한 나이인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는 걸. 오히려 30년 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시고 하소연을 하셨지."


"그래도 그들의 속마음은 네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그럴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할아버지의 사랑에는 통제나 질투심이 없었어.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만 느껴졌을 뿐이야. 그의 방식이 좋은 사랑이라고 느껴. 사실 나는 너의 사랑도 좋은 방식이라고 느껴. 네 말과 다르게 너의 사랑은 소유의 방식이 아니야. 나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아. 그냥 둘 뿐이지. 아마 언어의 방식 때문일까? 우리말에서는 남자 친구가 '있다'라고 말해. 가족이 '있다'라고 말하고. 딸이 '있다'라고 하지. 그런데 서양에서는 나는 남자친구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잖아(I have a boyfriend). 가족도, 자식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내 가족, 내 연인이라고 말하고."


"너희 나라도 '내 엄마'라고 하잖아."


"아니, '우리 엄마'라고 해. 우리 오빠, 우리 딸. 우리라는 개념은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이야. 개개인이 모인 가족이라는 커뮤니티에 속한 것이라는 느낌이랄까. 아마 전통적으로 공동체적인 사고방식이 있어서일 거야. 나만의 소유라기보다 모두에 속한 개체라는 개념이지. 지금은 조금 흐릿해져 가는 것 같지만 말이야. 서양은 개인중심이라 '나'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 내 엄마, 내 가족. 실제로는 개인을  자체로 존중하면서 언어에는 내 것이라는 소유적 개념이 있어."


"응. 어쨌거나.."



그의 줄임말에는, '너를 사랑해'가 숨어 있다. 신기한 것은 그의 머릿속 사랑의 개념은 소유의 방식일지 몰라도,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늘 존재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무슨 모습이건 받아들이고,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응원하며 지지해 준다. 그렇게 이 대화는 끝났다. 여전히 그는 고집 있는 프랑스인답게, 사랑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의를 고수한다. 뭐, 어쩌면 그가 옳을 수도 있겠지. 아니 옳고 그른 게 있기는 한가. 대화가 재미있었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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