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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사라 Feb 23. 2023

오늘의 유언 #2 [2023년 2월 22일]

매달 혹은 더 자주 유언장을 쓰기로 했다.

이번 유언장은 의식의 흐름대로.               



#1


주말 늦잠을 자고 일어나 평소처럼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쌓여있는 연락들을 살펴봤다.

부고 메세지가 와 있었다.

어렸을때 친했던 오빠가 보낸거였는데, 

잠결이라 ‘그래서 누가 돌아가셨다는 거지?’하면서 살펴봤다.

그리고 부고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그 오빠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아.......     


당신이 죽었구나.     


만으로 나이가 쓰여 있었다.

그래. 젊은 나이.

평소 몸이 안 좋은 편이라는 건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큰병이 있는건 아니었던거 같았고,

사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서 근황은 모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술담배를 모두 끊고 지내고 있었다.


왜 죽었을까?     

마지막은 어땠을까?

죽는걸 알았을까? 죽음을 앞둔 심경은 어땠을까?

그 사람 특유의 표정과 몸짓이 떠오른다. 

그런 모습 아니었을까.     


#2     


알래스카? 시베리아? 어딘가... 추운 지방에 사는 어떤 종족은 죽음에 대한 풍속이 있는데

바로 노인을 살해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노인을 존중하기 위한 행위이다.

노인은 나이가 많이들면 가족 중 한명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한다.

보통 가족들은 슬픔 속에서 노인을 회유한다.

그러나 노인이 그 요청을 거두지 않는다면, 짧은 기한 안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

그래야 가족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은 늙어서 쓸모없는 처지가 되어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기력이 있는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이 더 명예라고 생각한다.

극도로 추운 지방에서 살다보니 삶이 척박하여 더 극단적인 삶의 방식이 적용된 거 같다.        

  

현재 스위스에서는 인간의 안락사가 허용된다.

이밖에도 허용한 국가들이 있지만, 스위스는 외국인도 가능하다는 점 등 대표적이다.

소위 ‘존엄사’라고 부른다.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들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에 대해 개인이 삶을 끝낼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다.

(분분한 의견에 대해서는 형벌 중 인간이 판단하고 인간이 행하는 ‘사형’제도가 있는데,

개인의 선택이냐 사회적 합의로 이뤄진 선택이냐 정도는 다르지만

어쨌든,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것은 같다고 본다)     


무엇보다 개인이 타인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닌거 같지만, 

사실 스스로 생사를 결정한다는 것이 참... 이걸 도덕과 윤리와 사회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대부분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그만두고 싶은 사람들이 존엄사를 선택한다.

큰 고통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등 다양하게 무력하고 고립된다.

그러다보면 사회적인 존재인, 그리고 창의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러한 절망의 무력 속에서 연명하는 시간은 끔찍할 수도 있다.

심정적으로는 위 두가지의 존엄사에 대해 이해가 된다.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죽음(사고, 질병 등)을 제외하고

자타의 결정으로 일어나는 죽음은

쓸모있는 자가 아니라면, 

스스로 창의적이지 못한 존재라면,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거 같다.     


아.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인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다면 그것은 별과 같이 죽음이라는 것인가.     

     

#3     


나의 영정사진은 무엇을 쓰면 좋을까?


40세 이전에 죽는다면

현재 네이버 프로필사진 등 대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진으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40대 이후라면 5~10년 주기로 새로운 인생샷을 만들어야겠다.     


그리고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실리고 싶다.

아파서 초췌해진 모습이 아니라, 슬퍼서 절망적인 모습이 아니라

건강하고 아름답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마치 내 삶의 보편적인 시간이 그러하였다고.     


그런 생각도 든다.

내 추모식은 사진 등 전시회었으면 좋겠다고.


나의 사진, 나의 창작물, 나의 애착 물건 등이 즐비한 곳에서 

사람들은 다과를 먹으며 서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

(그러나 굉장히 이뤄지기 힘들다는 걸 안다. 

장례식 등 사후의 문제를 어느정도 미리 준비할 수 있지만,

결국에 이를 행사하는 것은 남은 유가족의 몫이기에 본인의 의지대로 될 수 없다는걸 안다)   

  

나는 왜 생일파티나 결혼식 등

살면서 화려하게 치를 수 있는 ‘잔치’보다 내가 사라진 이후에 발생할 ‘죽음의 행사’에 대해서

더 고민하는 것일까?     

자기만족이라고 하기에는 사후의 행사는 어찌보면 정말 상관없는 게 아닌가.

만족할 수 있는 생의 상태가 아니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는 그만큼 인간은 무한한 삶을 욕망하기 때문인거 같다.

죽어도 끝이 아니길 바라는 욕망.

진시황처럼 현재의 육체에서 영원하길 바라지는 않지만,

죽음이 정말 ‘무’하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고,

내가 사라져도 이 세상은 계속 지속되기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은 미련이 있다.

     

#4     


지난달 쓴 유언장에서 ‘다음 편에서 계속...’

이런 느낌을 남겨두기는 했는데

그 다음편이 오늘은 아닌걸로 하겠다.

다음에 다루거나, 여기저기에 녹여서 쓰는 걸로.




-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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