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유언을 씁니다. 계속 씁니다.
새해 첫 유언은,
1# 팬데믹 이후. 늦게야 깨달은 것들.
2# 다르다는 것. 나라는 개인에게 다르다는 것은 더 특별하다.
으로 두 가지 주제를 담았다.
우리 모두 팬데믹을 겪었다. 지금도 규제가 느슨해진 것이지, 전염병에서 자유롭지 않다. 바이러스의 강세는 약해진 것 같으나, 우리는 또다시 팬데믹을 겪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제 팬데믹에서 멀어진, 해방된 느낌이 들기도 할 거고, 아직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아파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코로나에 걸린 적은 없다. 그런데 팬데믹 기간에 감기를 앓았고, 코로나 자가 키트 검사에서 음성이었다. 그래서 혹시 검사가 오류 났을 수도 있고, 특별한 증상 없이 코로나가 지나갔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어쨌든, 최소한 지난 3년가량 모두가 팬데믹을 겪었다. 팬데믹 시기에는 몰랐던 것을, 이제 조금씩 일상을 찾고 달라지니 깨달은 것들이 있다.
우선 팬데믹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가져갔다. 사실 멀어질 인연들이기에 멀어졌으리라 생각하지만, 팬데믹은 그 시간을 더 당겨왔다.
그리고 폐쇄적인 일상을 살게 됐다. 밖보다 안. 같이 보다 혼자. 같이 있어도 밥을 따로 먹거나, 외부에서 하던 활동을 집에서 하게 됐다.
전반적으로 ‘혼자’가 늘어났다. 이게 문제라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의 일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반드시 팬데믹 때문에 변화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오고 있는 세상이었고, 팬데믹이 그 시기를 앞당기도록 도왔을 뿐이다.
이제는 마트에 가지 않는다. 밤에 로켓배송으로 주문하면 아침에 식재료를 받는 것에 익숙해졌다. 음식점 배달을 시키면, 문 앞에 두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외부의 것을 받더라도, 사람과 철저하게 비대면으로 살 수 있다.
그렇게 혼자더라도 문제 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말이다. 혼자가 싫으면 인터넷에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혼자서 비대면으로 살기에 정말 안성맞춤이다.
확실히 이제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졌다. 그만큼 내 일상도 변화됐고, 삶의 방향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더 발을 뗐다.
많은 것들을 비대면, 인터넷 등으로 처리한다. 멀리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길게 대기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걸 다 편리하게 처리한다. 그래서 반드시 오프라인으로 겪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몹시 지루하고 힘들다. 찾아가는 것도 일이고, 대기하는 것도 힘들다. 예컨대, 병원에 가는 일, 옛날에도 했던 것인데 이제는 너무 어렵다. 그만큼 참을성도 옅어지고, 인원이 밀집된 공간에 대해 답답함이 늘어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데믹은 나에게 중요한 시기에 찾아왔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편했다. 그만큼 일하지 않고 편히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되찾을 수 없는 시기에 팬데믹이 찾아와 덮어버렸다. 코로나의 시작 시점은 내가 본업에서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였다. 그런데 팬데믹 때문에 사회의 문이 강제로 닫혔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장하고 꽃 피워야 하는 그 소중한 시간을, 팬데믹이 앗아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상황과 가까운 미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인정하기로 했다. 나의 한계. 내 본업의 한계를.
그리고 업계의 생태계도 바뀌고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나는 이제 냉정한 결단을 내려야 했고, 합의점을 찾았다.
나의 본업은 지금 이 수준에서 계속 유지 정도 할 거다. 내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거의 그럴 거다. 어쩌면 잘해야 유지할 수 있다. 노력조차 안 하면 반드시 떨어질 거다.
그렇다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당장 시급하기도 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인류에게 닥친 변화 중 가장 빠르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직업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올 거다. 직업이 사라지거나, 업무의 방식이 변경 및 추가되거나, 새로운 경로가 생겨나거나 하는 다양한 이유로 여러 개의 직업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세상.
직업이 유지되더라도 파트타임으로 일하거나, 수입이 줄거나 할 수 있다. 그러면 N잡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직을 생각하는 게 아니다. 지금 상황의 장점을 찾아 비슷한 경로의 접근 가능한 것을 찾으려는 거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래서 천천히 새로운 일을 할 기회를 엿보곤 했다. 그러나 경우의 수가 1개라면 곤란하다. 더 만들어야 한다. 나라는 역량을 더 길러야 하고, 더 공부하고, 더 예리하게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지난 2023년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도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왜냐하면, 꾸준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때문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더 나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상을 지키기 위해 돈은 벌어야 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을 5개 이상 늘리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원래 하는 일이 방해받아선 안 된다. 참 어렵다.
어쨌든, 나의 역량을 기르는 일. 그게 답에 가까운 액션이다.
“나에게 다르다는 것은?”
옴니버스로 서술하는 거보다 시간순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것에 민감하게 느껴졌다. 그때 누구나 그런 시기다. 그런데 나는 사춘기의 특징만이 아니라 찐이었다. 다르다는 건 무척 소중하지만, 구별되거나, 차이가 생기는 것은 타인 속에서 고립감과 도태된다는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한 불안 속에서 내가 선택한 건 ‘심리상담’이었다. 평소 ‘나만 예민하게 느끼는 건가? 아니면 정말 다른가? 다르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다르더라도, 나는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다. 내가 선호하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들을 따라서 변하긴 싫은데, 그들과 섞이고는 싶다’라는 고민이 있었다.
우연히 언론매체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상담센터가 있었다. 나를 심층 인터뷰한 언론매체에서 후속편으로 그 상담센터 인터뷰를 달았다. 그래서 센터에서 나를 초청했었다. 그래서 방문하게 된 곳. 그리고 담당자에게 나도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상담은 시작됐고, 초기에 상담자가 교체됐다. 더 잘 맞는 상담자에게 인계하겠다는 거였다. 결과적으로는 내 인생의 심리상담자였다.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그나마 나를 가장 가까운 수준에서 바라보는 상담자였다(나는 수많은 심리상담자를 만났었다). 그 상담자와는 그 당시 1년가량 상담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수년 후 다시 만나 그 상담자 자택에서 개인 상담을 받았다.
십대 시절 내내 나는 ‘다르다’는 것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사회성에 문제가 있거나, 현저히 낮은 사회성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성도 좋고,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겪는 작은 세상 속에서 나는 늘 ‘다르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했고, 나도 다르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다르다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볼 때가 많다. 사람들은 나에게 “외국에서 살아야 할 마인드야”라고 정의 내리면서 서로의 다른 시각을, 틀린 시각으로 못 박았다.
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 사는 기분. 다르게 생각한 것뿐인데, “너는 너무 개방적”이라며 수없이 오해와 차별을 받아야 하는 입장.
혹은 “상상력이 풍부해. 너무 이상적이야.”라는 말들로 배척당해왔다.
다르면 튄다. 다른 생각을 하면 오해받기 쉽다. 다른 행동을 하면 눈치, 혹은 저지당한다. 내가 유난 떤다거나, 나르시스트라든가, 강한 성격이라고 평가받기 쉽다.
계속 그 ‘다르다’에 따르는 수많은 꼬리표 때문에 여러 차례 심리상담을 받았다.
다른 거지, 우월하다고 타인을 낮춘 적 없다. 다른 의견인 거지, 타인을 틀렸다고 한 적 없다. 그런데 말이란 건 참 어렵고, 사람의 심리도 복잡하다. 내 의견을 강화하고자 하는 말들은 결국 타인을 틀리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나는 그리 자만하지 않는데. 그런 오해를 사곤 했다. 아니 정말 난 자만할 수 없는 삶이었는데 말이다.
시기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나도 그러한 시기를 받았을 뿐. 있을 수 있을 만한 상황인데, 내가 예민할 수 있다.
이런 반복되는 편견과 수많은 고민과 성찰을 거치면서 다행히도 나는 나름의 방법을 익혀온 거 같다.
오해가 잦은 행동을 고치거나, 완화하는 것. 나는 아니지만, 모든 이들이 하고 있다면 그냥 따르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로는 ‘다르다’는 것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 세상에는 또라이도 많았고, 나보다 특이한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있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다시금 느낀다.
‘아. 나는 다르구나.’
나라는 본질이 어떻게 확 변하겠는가. 그저 나는 나다. 좀 다른 태도를 하고, 다른 방향을 살피기 좋아하는 나다.
그래. 나와 다른데, 온전히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 나도 나와 다른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는걸. 그저 애정과 노력으로 안으려는 것이지.
어릴 땐, 다르다는 것 때문에 많이 외로웠다. 물론, 이따금 나를 스페셜, 특별함으로 표현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준 사람들.
다르다는 걸 잠시 잊고 지냈다. 근데 알고 지내는 게 맞는 것 같다. 망각하고 지내다 보면, 몸에 기름칠한 채로 언덕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나는 언덕을 타는데, 결과적으로 타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거다.
애초에 다른 걸 인정하고 접근해야 서로 오해가 없다. 나는 어릴 때 다르면서 같은 것처럼 섞이려고 일방적으로 다가간 게 아닐까 싶다. 다르면 다른 방식을 취해야 했다. 다른 데 다른 이들과 같은 방식을 취하니 오해가 생기고 생채기가 남는 거다.
바보.
서른이 넘어서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어린 나처럼 또 다시 상처받지 않기를.
(일반화가 아닌 개인의 다름을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