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한 상담사입니다

프롤로그

by 별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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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소개할 때 “심리상담사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좋다. 상담사라는 직업이 특별히 멋지기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나의 심리적 문제와 부딪치며 넘어지고 일어섭니다. 그 반복 속에서 배운 고통과 회복의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대학 상담센터 인턴 시절, 상담을 마치고 나온 선배가 내담자 이야기를 하며 말했다.

“이분은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는데, 좀 유심히 봐야겠죠?”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하루라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요… 그건 이상한 걸까요?”

순간 함께 일하던 인턴선후배들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사실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어둡고 절망적인 생각만은 아니었다. 삶의 무게를 느끼는 동시에,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게 우울 또한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일상을 무너뜨릴 만큼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림자처럼 곁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그림자는 나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2018년 5월, 출산 후 찾아온 변화.

호르몬 불균형, 수면 부족, 초보 엄마의 불안감. 그럼에도 작은 생명을 품에 안고 지내는 시간은 대부분 행복했다.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나와 아이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불안이 높은 아이는 세상 모든 낯선 것을 거부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시절, 하루의 대부분을 아이와 단둘이 집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지냈다. "사회성은 희미해졌고, 나는 점점 '엄마'라는 역할 뒤에서 '김혜진'이라는 내 이름을 잃어갔다." 성취감 없이 무력한 하루들이 이어졌고, 아이의 생존을 지키는 것만이 내 존재 이유가 되어버렸다.


아이는 5세부터 유치원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이가 적응을 못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답답한 집에서 벗어나 사람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은 들 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이는 1년 반 동안 유치원 등원을 거부했다.


예민한 우리 아이는 활동이 크고 예상이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친구들을 두려워했고 경계했다. 때문에 가까이 오는 친구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 유치원생활 부적응이었다.

매일 같이 새우등으로 고개를 숙이며 선생님들과 유치원 엄마들에게 죄인으로 지냈다. 유치원 말고도 낯선 환경 모든 곳에서 아이는 힘들어했고,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진땀을 흘리며 도망치듯 아이를 안고 나온 날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아이가 이해가 되지 않고 미운적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더욱 깊은 죄책감으로 잠든 아이를 붙잡고 흐느껴 울었다. 어느 날은 오래된 친구의 걱정조차 비난으로 들려, 구석에 앉아 몇 시간을 울면서 생각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내 삶도, 나도 먼지만도 못한 존재인 것 같아..’ 그 이후 이석증까지 와서 어지러운 세상을 힘겹게 지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었다.


상담사인 나도 상담사의 손길이 필요했다. 아이와 놀이치료를 받으며, 나와 아이를 객관적으로 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놀이치료 선생님께서는 나와 아이를 진심으로 위로 하고 따듯하게 공감해 주셨다. 아이와 나는 동굴에서 그렇게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나아지니 아이도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하원 후 유치원 놀이터에서 아이는 종종 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예민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우리 아이를 눈과 몸으로 거부하는 친구들과 엄마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놀러갈 때, 우리는 소외되었다.

그 때, 모래사장에 혼자 있던 아이에게 주용이라는 친구가 다가왔다. 주용이 엄마는 우리 아이가 유일하게 장난감을 빌려 준 착한 친구라며 다가와 주었다. 그들은 편견 없이 우리를 품어주었다. 주용엄마는 운전을 못하는 나를 온갖 좋은 곳을 함께 데리고 다녀주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그들 덕분에, 우리는 사회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체육유치원으로 함께 옮겨 밝고 씩씩하게 적응했다. 유치원에서 힘들어했던 아이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도 이제야 조금씩 사람처럼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주용엄마는 내게 물었다. “혜진아, 너는 뭘 좋아해? 다시 일을 한다면 뭘 하고 싶어?” 오래 잊고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언제였을까. 8년 만에 ‘엄마로서의 나’가 아닌 ‘김혜진으로서의 나’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조금씩 내 삶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다시 상담공부를 시작했다. 치유하는 그림책들을 읽고, 미술치료를 배우고, 상담의 본질을 되새겼다. 그 시간들은 나를 회복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지금 나는 초등학교에서 ‘사회정서교육’을 강의하고 있으며, 집단상담을 하고 있으며, ‘마음단단클래스’라는 사회정서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1학년이 된 아이는 이제 학교에서 친구들과 환하게 웃는다.

등굣길에서 “우주야!” 하고 부르며 반갑게 달려오는 친구들을 보고, 나는 몰래 눈물을 닦았다.


우리가 힘들었던 이유는 ‘고립’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한 것은 ‘사람’이었다.


예전의 나는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바닥을 알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살게 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 되어 있고,

연결이 빛이 되어 준다는 것을.


내게 바람이 하나 있다.

누구든 서로에게 작은 상담사가 되어주는 세상을 만드는 것.

서로를 위로하고, 고립되지 않게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우울한 상담사다.

하지만 그 우울은 내게 상처가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감사함과 간절함으로

오늘도, 분명 누군가와 ‘함께’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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