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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Mar 15. 2021

딸아이의 이직


딸아이는 대학 졸업 유예를 하고 1년을 실컷 놀았다. 있는 돈을 몽땅 털고 내 돈을 조금 보태서 세 달 해외여행을 떠났다. 여자 아이를 혼자 보내는 것을 잠시 주저했지만, 내가 그 나이라면 해 보고 싶은 일이었으니, 그래 가거라 응원하며 보냈다.


잘 다녀왔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그 아이의 내면을 단단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취업을 준비한다며 몇 달을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 내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 없으니, 그때가 가장 열심히 공부한 것은 맞다. 컴퓨터공학 전공이라 배워야 할 것이 계속 생겨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남으로 학원을 다녀가며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몇 군데 원서를 넣어 두고는, 나더라 취업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기대를 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첫 면접시험을 다녀오더니 그날 바로 합격 통지를 받았다. 아주 큰 회사는 아니지만 제가 실무를 하며 배우고 싶었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회사라며 좋아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놀다 원서 넣을 걸 그랬다며 배부른 소리를 하면서 즐겁게 출근을 했다. 일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을 딸아이에게 볼 수 있어서 지켜보는 나도 좋았다.


삼 년을 즐겁게 잘 다니더니 이직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왜 이직하느냐 했더니, 새로운 다른 프로그램을 배우고 익혀야지 한 프로그램만 할 줄 알면 안 되는 것이 IT 세계라며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출근을 하면서 밤늦도록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안쓰러웠다. 가고 싶은 회사에 원서를 넣고 며칠 까칠하게 굴어서 다니는 회사가 있으니 든든한 보험이다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하라는 말만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면접날이다. 딸아이 방에 불이 켜 있어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공부한 흔적이 가득하고 메모장에 일어나서 오늘 할 일을 순서대로 적어놓은 것이 보였다. 일어나서 요약한 것 한 번 보기, 아침 먹기, 회사 앞에 두 시간 전에 도착해 카페에서 다시 한번 보기 등이 적혀있다. 내 마음이 짠하다. 이틀 휴가를 낸 상태라 아직 침대에 있는 딸아이 얼굴을 만져주며, 잘하고 오라고,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끝나면 전화하라는 말을 해 주고 나는 출근을 했다.


오후에 전화가 왔다. 막 면접을 마치고 나온 목소리가 많이 올라가 있다. 다른 사람은 한 시간 정도 면접했다는데 나는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이것 저것 너무 많이 물어보더라, 아는 대로 막히지 않고 대답은 잘한 것 같다, 결과는 나중에 알려준다고 했는데 모르겠다, 연봉은 내 맘대로 확 질렀다, 어쨌든 끝나서 속은 시원하다, 그리고 친구들이랑 만나서 맥주 한 잔 할 거다 등등의 말을 통통 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썼다,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것은 좋은 징조다, 실컷 놀아라, 이따 밤에 만나자는 말을 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딸아이는 아까 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전화를 해 왔다.

" 엄마, 나 됐어요. 출근하라는 연락 왔어요."

"어마? 정말? 이렇게 빨리 연락이 왔어? 잘 됐다. 엄마가 느낌이 좋더라구. 언제부터 출근하래?"

"응. 지금 회사에 인수인계하고 나서 출근하면 되는 거예요. 한 3주 걸리겠지요. 연봉도 내가 제시한 대로 준다네요. 크크 너무 불렀나 후회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장하네. 엄마 딸. 애썼어. 언제 들어오니? 엄마랑도 축배를 들어야지."

"엄마랑은 내일 해요. 친구들이랑 놀다 늦어요."

"그래, 재밌게 놀아."


정말 기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취업도 이직도 쉽지 않은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이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큰 욕심을 내거나 지나치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지내는 딸이 참 좋다. 새로운 곳에서 업무면에서도 발전이 있고, 새롭게 만나는 인간관계에서도 부대낌 없이 잘 적응하며 봄내음처럼 가벼운 출근길이 되길 바란다.


축하해.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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