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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May 26. 2021

인간을 망가뜨리는 감정, 수치심


수치심(羞恥心)은 스스로를 부끄러워 느끼는 마음이다. 어떤 행동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면 자신의 잘못에 죄책감을 갖는다. 죄책감은 잘못된 행동을 개선함으로써 인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지적하는 수치심은 타인을 공격하거나 스스로를 비관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는 10대 미하엘과 30대 한나의 사랑 이야기이다. 한 계절 짧게 사랑을 나누고, 갑작스런 한나의 떠남으로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았다. 법대생이었던 미하엘은 포로 수용소 감시원이었던 한나의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나와 재회한다. 이 과정에서 미하엘은 한나가 문맹인 사실을 알게 되고, 갑작스레 자신을 떠난 이유가 문맹인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하게 된 것도 자신의 문맹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던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 자신의 문맹이 드러날까 자신이 저지른 범죄보다 더 큰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을 보았다.


한나는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는 여자였다. 처음 미하엘을 만났을 때, 구토하던 미하엘의 토사물을 치워주고 집으로 데려다 주는 것, 자신을 찾아온 미하엘과 사랑을 나누는 것 등 감정에 솔직하고 당당했던 여자였다. 그녀는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을 통해 문학을 접하고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더없이 행복해 하였다. 그녀는 철도 검침원을 하는 동안에도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문맹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사무직이 아닌 포로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여자였다. 그렇게 당당하게 삶을 살던 한나가 자신의 수치심이었던 문맹을 감추기 위해 사랑했던 미하엘을 떠나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감시원을 하게 되고, 결국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을 받게 되는 것은 수치심이 한 사람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한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 169p)>


한나는 문맹이었다. 어떤 배경으로 그녀가 문맹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문맹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문맹을 알게 될까봐 그녀는 두려웠다. 어린 미하엘이 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던 한나, 만약 한나가 자신의 문맹을 미하엘에게 드러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한나에게 사무직으로 승진하게 한 상관에게 자신의 문맹을 드러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감시원으로 일하며 수용원들을 폭격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당할 때, 함께 일했던 감시원들이 그 보고서를 한나가 작성한 것이라고 죄를 뒤집어씌웠을 때 자신의 문맹을 드러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어느 순간에도 자신의 문맹을 드러내지 못했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넘어선 사람이다. 자신의 약점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순간, 그것을 감추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거짓과 위선을 만들어 감추려하는 소모적인 노력을 멈추게 된다. 그 이후, 자신의 약점을 감추느라 급급했던 수치심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갖게 되고 그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누군가가 자신의 약점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 떠는 사람은 수치심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 전전긍긍하게 되고 때로는 자신을 망가뜨리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필적 검사를 통해 확인해 보자는 판사의 말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포기하듯 자신이 했다고 말해버리는 한나처럼.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끔 문제가 되는 것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잘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알기 어렵다. 의식, 또는 무의식 깊숙한 곳에 눌러 놓았다가 갑자기 건드려져 솟아오르는 화산처럼, 결코 타인에게 드러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수치심을 건드리게 되면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한나는 자신의 문맹이 드러날까봐 사랑을 놓쳤고, 승진의 기회를 내팽개치고, 심지어는 자신의 범죄보다 다 큰 판결을 받았다. 한나의 수치심은 자기를 파괴하였다. 노회찬은 정치자금법 위반이 드러나자 스스로를 던져버렸다.


소설<책 읽어주는 남자>의 마무리는 무겁지만 다행이다. 한나를 위해 그녀의 문맹을 증언하지 못한 미하엘이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를 교도소로 보내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글을 깨우쳐 자신의 약점이었던 문맹을 극복하는 과정은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한나가 자기를 떠나버린 이유를 늦게 알게된 점, 한나의 문맹을 판사에게 말하지 못한 점, 끝내 한나를 만나지 않은 점 등으로 미하엘은 한나에 대해 미안함을 느꼈고, 그 마음을 담아 한나에게 책을 읽어 테이프를 보내주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한나는 오롯이 혼자와 대면하게 되는 기나긴 수감생활에서 글을 깨우쳐 편지를 쓰고 사인을 하고, 결국 교도소의 책을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재판 과정에서 언급된 사실들에 대해서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책 읽어주는 남자 247p)>


형기를 마치고 퇴소하기 일 주일 전, 미하엘과 마주한 한나는 미하엘의 이 말에 결국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의 문맹을 수치스럽게 여겨 감추기 위해 자신의 끊임없이 망가지게 했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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