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에 먹는 수박을 참 좋아한다. 과일은 대부분 다 좋아하지만 수박은 거의 사랑 비슷한 감정마저 느낀다. 성인이 되어 혼자 살 때는 여름이 되면 주말에 엄마집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자취생 혼자서는 수박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 집에 수박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과일도 맘껏 못 먹고사는 자취생이 가련했는지 곧잘 수박을 사 오시곤 했다. ’엄마, 수박‘이라고 말하고 기다리면 숭덩숭덩 잘린 수박이 그릇에 담겨 내 앞에 놓이던 게 여름 하면 생각나는 기억의 한 자락이다. 이글거리는 창문 밖,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소파에 누워 까딱이던 맨발, 잘 익어 빨간 속살을 수줍게 뽐내던, 그러나 조금은 투박하게 잘린 수박.
결혼을 하고도 나의 수박 사랑은 식을 줄 몰랐으나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 덕분에 과일 분야에 있어서는 자취생과 크게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여름이 되었으니 온라인에서 수박을 시켜보았는데 웬걸, 전혀 달지가 않았다. 어쩌겠어, 먹어야지. 체념하고 먹으려 했으나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아 절반은 버리게 되었다. 크게 실망한 나의 다음 타겟은 썰어서 가져다주는 배달 과일집이었다. 후기를 슥 둘러보니 당도만큼은 확실하게 보장되는듯해 500g을 무려 만오천 원이나 주고 시켜보았다. 과연 맛은 확실히 있었으나 손바닥만 한 사이즈라 아껴먹어도 두 번이면 다 먹을 양이었다. 이건 너무 사치가 아닌가? 한 번은 시켜 먹어볼 만했으나 재구매하기에는 죄책감이 들었다. 만오천 원이면 수박 한 통 값인데 이럴 바엔 실패할지언정 한 번 더 도전해보자 싶었다.
여름치고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남편과 마트에 갔다. 저녁이었는데도 사람이 많았고 수박은 꽤 많이 팔린 상태였다. 수박은 사이즈별로 있었다. 15평 남짓한 공간에서 소꿉놀이 같은 살림을 꾸리고 있는 우리는 제일 작은 5~6kg짜리 수박을 살 수밖에 없었다. 큰 수박을 선뜻 집어가는 분의 냉장고 사정을 부러워하며 나는 작은 사이즈 수박을 통통 두드려보았다. 수박은 두드려봐야 한다던데 사실 정확히 뭘 봐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이것저것 두드려보고 소리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랐다. ’11브릭스 당도 보장‘이라고 당당하게 쓰여있는, 제법 경쾌한 소리가 나는 녀석이었다. ‘이사 가면 큰 수박을 사자. 우린 이제 더 행복할 일만 남았어.’ 그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우리의 미래도 ‘당도 보장‘일까? 생각하며 나는 희망차게 그의 손을 잡는다.
사이좋게 수박을 나눠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두근대는 마음으로 수박을 잘라본다. 맛없는 부분은 조금도 먹지 않겠다는, 그저 맛있는 부분만을 탐미하겠다는 일념 가득한 눈빛을 하고 분주하게 수박의 흰 부분을 도려낸다. 예쁘게 깍둑 썰기한 후 조심스럽게 가장 가운데 조각을 먹어본다. 달다…! 성공이었다. 안도하며 빈 통에 차곡차곡 담에 작은 냉장고를 가득 채운다. 괜찮은 수박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우니 마음이 풍족하다. 긴 여름이 될 텐데, 적어도 앞으로 일주일은 든든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