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는 지원이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이상하게 슬퍼졌다
그러니까 그날도 서은빈은 교실에서 애들 몇 명을 불러놓고 그들만 즐길 수 있는 은밀한 게임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옷을 하나씩 벗어야 하는 왕게임. 서은빈이 왕게임 중이래, 하는 이야기가 들리면 각 반에서 용기 있는 애들 몇 명만이 그 모습을 실제로 확인하고 오곤 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봐서는 안 되는 걸 보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갔다 온 애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와야만 했다.
“한지원도 있단다.”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말이 맞았다. 내가 지원이네 교실 앞에 도착했을 때, 지원이는 교실 뒤 사물함 앞에서 교복 치마 위에 브래지어만 입은 상태로 서은빈과 함께 있었다. 지원이는 웃고 있었다. 아주 어이없지만 아주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쩌면 그런 자신이 조금은 대단하다는 식으로. 그날 나는 지원이와 크게 싸웠다.
“니는 학원을 가잖아. 니가 학원에 가면 나는 혼자다. 집은 숨 막히고. 맥도날드에서 니 학원 마칠 시간까지 기다릴 때 보면 함씩 대왕 오락실에서 서은빈이 놀고 있드라. 니도 안다이가. 서은빈이 우리 언니랑 잘 아는 거.”
지원이는 빨개진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해가 지고 깜깜해진 주공아파트의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힘없이 찌르륵거리는 풀벌레 소리와 달라붙는 모기 때문에 온몸이 그닐그닐 가려웠다.
“걔, 내한테 잘해준다. 이은지 니랑 놀 때랑은 또 다른 편안한 느낌이 있다. 막혔던 숨이 뻥 뚫리는 것처럼 속이 시원할 때가 있다고.”
지원이는 그네 앞에 서서 말했다. 그런 적은 없었다. 놀이터에서 둘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그네 위에 앉아서였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은지 니가 내 베프는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니가 내를 제일 잘 아는 건 아니다. 어쩌면 내를 더 잘 아는 건 서은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걔한텐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줘도 부끄럽지가 않드라. 그래서 그랬다. 왕게임을 걔랑 한 것도 그래서라고.”
그렇게 말하는 지원이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이상하게 슬퍼졌다. 지원이의 여드름을 처음으로 본 건 나였지만, 지금 지원이의 비밀을 아는 건 내가 아니라 서은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지원이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도 지원이의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햇빛 없이 깜깜한 밤인데도 몸이 뜨겁고 머리가 너무 아팠다. 나는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었다.
며칠 뒤, 나는 하늘색 아크릴 이름표를 지원이에게 선물했다. ‘구름계상’이라고 각인된 이름표였다. 구름계상은 지원이가 팬카페에서 쓰는 닉네임이었다.
“우리 다음에 꼭 이거 끼고 지오디 콘서트에 같이 가자.” 지원이는 대답이 없었다.
3학년이 되었다. 그해 3월, 지오디 오빠들의 100회 콘서트가 끝났다. 이후 오빠들은 긴 휴식기를 가졌다. 오빠들의 방송 횟수가 줄어들자, 지원이와 내가 함께 나눌 이야기도 사라졌다. 우리를 꽉 묶어주던 무언가가 조금씩 힘을 잃고 흐릿해졌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까지도 지원이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학교는 인문계로 갈 아이들과 실업계로 갈 아이들로 자연스레 나뉘어졌다. 처음으로 우리는 같은 교복을 입고도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서은빈은 그해 겨울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는 조용해졌지만,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건 선생님이 바뀌었고, 지원이와 함께 가던 분식집은 문을 닫았다. 서주 사거리 쪽에 들어온 김밥천국에 손님들을 뺏겼다고 했다. 지원이는 오징어 숏다리가 물린다며 먹지 않았다. 지원이가 먹지 않으니 오징어 숏다리 한 봉지가 나에겐 너무 많았다.
“우리 언니 대구로 간단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잠깐 마주친 지원이가 내게 말했다.
“미용 기술 배우러.”
복도는 너무 시끄러웠다. 지원이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나는 몇 번이나 되물었다.
“잘 된 거 아니가.”
내 말에 지원이는 잠깐 고개를 떨궜다. 한숨을 내쉬는 것도 같았다. 그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민희 언니 때문에 니도 짜증 날 때 많았잖아.”
지원이는 말없이 교복 치마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로 한쪽 발을 복도 바닥에 비벼댔다. 한겨울에 속살이 비치는 얇은 검정 스타킹을 신은 지원이의 다리는 더 가늘고 길어 보였다.
“이은지, 니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진짜 못 알아듣나?”
고개를 든 지원이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은빈이 자기를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그날이 떠올라서였는데, 지원이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면 나는 뭐든지 다 조심스러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뼛성이 났다.
“미용하러 가는 건지 아닌지 알 게 뭐냐고.”
뒤축이 구겨진 실내화를 발가락 끝으로 흔들며 지원이는 말했다. 실내화는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복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소음과 먼지,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는 사이 수업 종이 쳤고, 나는 과학실로 심부름을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지원이의 이야기를 더는 듣지 못하고 얼른 이동해야 했다. 그때 이후로 지원이는 복도에서 나와 마주쳐도 모르는 척 지나가는 일이 많았다. 한지원, 하고 부르면 그제야 어, 안녕, 하고 말았는데 그러는 일이 잦아질수록 나도 이제는 지원이를 굳이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해 연말, 오랜 공백 끝에 지오디의 5집이 나왔다. 그 앨범을 마지막으로 윤계상은 지오디를 탈퇴했다.
나는 인근의 서주여고가 아닌, 지하철 동주역 쪽에 있는 동여고로 진학을 희망했다. 그곳의 학군이 좀 더 낫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고등학교 배정 발표가 나기도 전에 지하철역과 가까운 중앙대로 쪽 아파트로 이사를 결정했다.
“살 만한 사람들은 대로변 쪽으로 다 내려가는 거지 뭐. 우리 아래층 반장 집도 집 내놨다드라. 얼른 팔고 내려가는 게 맞다.”
이사하는 날, 엄마와 아빠는 새미로를 벗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동주역 주변으로 시청과 경찰청의 이전이 확정되면서 중앙대로 쪽에는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을 잘 아는 사람들은 거기가 돈이 되는 땅이라 했다고, 아빠는 주택 공사에서 일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빌려 말했다. 이삿짐을 실은 대형 트럭은 좁고 경사진 새미로를 용케도 잘 빠져나갔다. 우리는 아빠의 오래된 중형 세단을 타고 트럭 뒤를 따라 내려갔다. 차창 밖으로 서주초등학교가, 민희 언니가 다니던 미용고등학교가, 지원이의 집에 가기 위해 수백 번은 건넜을 주공아파트의 횡단보도가, 그리고 놀이터가 차례대로 사라졌다. 살짝 열린 창 사이로 서늘한 냉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두 입술을 오므려 창문에 입김을 불었다. 그러는 동안 새미로를 완전히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창문은 이내 뿌예졌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졸업식 날은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밤사이 내린 눈 때문에 길은 꽝꽝 얼어있었다.
“이래 눈이 많이 와뿌리면 새미로 쪽은 말도 못 하겠네. 서주초 옆에 내리막길, 거기 어짤끼고. 몇 년 전에도 눈길에 거기서 사람들 여럿 다쳤다. 여기는 그래도 싹 다 치웠네.”
제설 작업을 마친 집 주변의 깨끗한 도로를 내려다보며 엄마가 말했다. 실제로 학교에 도착했을 때, 교실에는 절반만 등교한 상태였다. 담임 선생님은 등교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빴고, 예정되었던 졸업식도 한 시간이나 늦춰졌다. 교실에 도착한 우리는 졸업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운동장에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교 정문으로 눈 때문에 늦은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원이도 거기에 있었다.
다행히 늦춰진 졸업식 시각에는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교생 모두가 등교를 완료했다. 어둡고 습한 강당 창밖으로 여전히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진학 현황을 읊었지만, 애들의 눈은 모두 창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동여고로, 지원이는 민희 언니가 다니던 미용고로 가게 됐다.
“이제 다른 교복 입겠네.”
“그러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의 비닐을 구기며 지원이는 말했다.
“거기 교복이 서주동에서 제일 예쁘잖아. 한지원 니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
지원이는 표정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처음으로 지원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로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지원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지원이에 대한 것들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렸었다는 것에 놀랐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같은 교가를 불렀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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