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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tripper Mar 14. 2016

나의 이직연대기

라디오 작가에서부터 콘텐츠 기획자까지

일단 내가 해봤던 일들을 연대순으로 가능한 솔직하고 상세하게 적어보겠다. 고용형태와 함께.



2007년 가을 - 겨울

방송국 다큐 프로그램(TV/라디오) 프리뷰

아르바이트


2008년 아마도 늦겨울 - 봄

사보 에디터

프리랜서


2008년 봄 - 겨울

K본부 라디오 막내 작가

프리랜서


2009년 봄 - 2010년 여름

E 광고대행사 콘텐츠 작가

계약직


2010년 여름

B 빵집 점원

아르바이트


2010년 겨울

D 출판사 아르바이트 직원

아르바이트


2011년 겨울

S본부 경제 방송 인터넷 기사 편집자

프리랜서


2011년 봄 - 초겨울

B서점 에디터

정규직


2011년 겨울 - 2012년 1월 무렵

K본부 보도국 작가

프리랜서


2012년 2월 - 2013년 가을

다시 E 광고대행사 AE

정규직


2013년 초겨울 - 그해 12월 중순

금융권 회사 H 교정/교열 에디터

파견-정규직


2014년 봄 - 여름

P 광고대행사 AE

정규직


2015년 봄 - 늦가을

대기업 계열사 S 콘텐츠 기획자

계약직



솔직히 말하면 내가 써놓고도 지금 좀 스스로 놀라고 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 지원할 때 쓰는 이력서에는 짧은 기간 했던 아르바이트 같은 일들은 적지 않기 때문에, 많아야 5-6곳의 이력만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력과 이력 사이에도 나는 거의 쉼 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회사를 다니고, 다양한 일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뭘 해야 좋을지 몰랐다"는 대답이 첫 번째고, "회사는 위험하니까요"가 두 번째 대답이다.


앞서 프롤로그에도 짧게 적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라디오 작가'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직업에 대한 생각, 플랜 B를 갖고 있지 않았다. '회사'라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그곳에서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졸업하고 나서야 잡코리아니, 사람인이니 하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봤을 정도니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찌 그리 태평할 수 있었는지, 평생 해나가야할 '일'에 대한 고민을 어쩜 그렇게도 하지 않았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때 응당 치열하게 했어야 할 고민을 하지 않은 대가를 지금 이렇게 치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과 음악을 좋아하는 라디오 키드였다는 이유로 나는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었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꿈을 이루어서 행복했던 순간은 짧았고, 꿈이 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송'이라는 일의 특성상, 언제나 시간에 쫓겼고 시간에 겁박 당했으며 자그마한 실수도 용서받기 어려우리란 생각에 완벽해져야 했다. 함께 일하는 직속 선배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와 다른 사람이 있을 때의 태도가 달랐고,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내게 무언가를 살갑게 가르쳐주는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을 이곳에서는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즈음, 피디가 일방적으로 나를 해고했다.


표면적 이유는 '교체된 사장이 막내 작가들을 해고하라고 했다, 너를 대체할 경력 작가가 오기로 했다'였지만, 훗날 알고 보니 (아마도 피디 지인으로 추정되는) '라디오 경험이 전혀 없는' 새로운 작가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였다. 그에 대해 따져 물었을 때 그 피디는 "네가 너무 조용해서, 나중에 사고를 쳐도 크게 칠 것 같았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실수 한 번 없이 묵묵하게 열심히 일한 내가 받은 대가였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다. 4대 보험? 봄/가을 개편 때마다 밥그릇 걱정을 해야 하는 작가들에게는 꿈 같은 소리다. 심지어는 계약서 같은 것도 쓰지 않는다. 작가의 목숨줄은 피디, 임원의 손 안에 쥐어져 있다. 연차가 높은 작가들은 몰라도, 나 같은 막내 작가들은 사실상 일용직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한다 해도 피디의 개인적 호오에 따라 나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것이었다.




첫 직장 생활에서 얻게 된 경험치고는 상처가 컸다. 꿈은 산산히 깨어졌고,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우연히 연락이 왔다. 혹시 콘텐츠 작가 일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해볼 수 있는 일 같았고 어쨌거나 '글을 쓰는 일'이었기에, 무엇보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필요했기에 일을 시작했다. 2-3달 정도 아르바이트 식으로 하게될 줄 알았던 일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광고주(기업)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그에 들어가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쓰는 일들을 주로 했고 AE들이 요청하는 글들을 내내 썼다. 일도 꽤 재미있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았다. 국장 한 사람을 빼면. 처음 회사와 계약을 할 때 국장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는 "4대 보험을 드는 것보다 3.3% 원천징수만 떼는 게 수령하는 금액이 더 많으니,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마치 자신이 단돈 5만원이라도 더 내 주머니에 찔러주는 것처럼.


다시 말해 계약직 고용이 아닌 용역 계약으로 매달 계약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계약을 진행하면 내가 그 회사에서 2년을 일해도 무기계약으로 자동 전환되어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 때고 쉽게 나를 내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가 26살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까마득하게 어렸다. 4대 보험이니, 계약서니, 원천징수 이런 것들이 뭔지도 잘 몰랐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순진하게 용역 계약으로 그 회사에서 2년 가까이 일을 했다. (대학에서는 필수 교양으로 노동법 강의를 개설하라...)


용역 계약, 통칭 알바로 불렸기 때문에 계약직과 정규직이 받는 당연한 혜택들, 연차나 명절 선물, 급여 인상에 대해서도 나는 배제되었다. 1년하고 몇 개월을 다닌 뒤였을까, 나와 같이 용역 계약으로 작가를 하던 친구와 이 부당함에 대해 국장에게 항의했다. 1개월 만근을 하면 하루의 연차를 달라, 1년 이상 이곳에서 일을 하며 그만큼의 경력과 경험이 쌓였고 일의 숙련도가 높아졌으니 급여를 인상해달라. 국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해대며 이를 거부하려 했지만,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논리적으로 따져 물으며 압박했더니 결국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TO가 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줄게. 그러니까 열심히 일해."라던 감언이설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스물일곱의 반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는 다음달 일을 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비정규직이었다. 그 즈음에는 하고 있던 일에도 진력이 나 있었다. 어쨌거나 글 비스무레한 것을 쓰고는 있었지만, 광고성 활자에 더 가까웠던 그것들은 내가 뱉어낸 거짓말들이었다. 거기에다 능력은 없으면서 무례하고,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하면서도 그것의 어디가 잘못된 줄도 모르는 국장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해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 상사에 대한 불만이 모여 나는 첫 자발적 퇴사를 했다.  




첫 퇴사 후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을 찾게될 줄 알았다. 또한 좋은 회사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아도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건 '뭔가를 쓰는 일'이었기에 줄곧 그런 일들을 찾아다녔다. 에디터, 작가, 콘텐츠 기획 따위의 이름을 가진 일들을 구직 사이트에서 열심히 검색했고 살폈으며 입사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해서 여러 번 다시 취업을 했다. 한 번 퇴사한 회사의 오퍼를 받아 다시 다니기도 했고, 다시는 '을'로는 살고 싶지 않다며 AE로 일한 광고대행사를 퇴사해놓고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한 번만 더 해보자, 하며 다시 광고대행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재취업은 오히려 처음 취업을 할 때보다 손쉬웠고, 나날이 면접을 보는 스킬도 늘어갔다. 덜덜 떨며 메에에- 염소 같은 목소리를 내던 사회 초년생은 어느덧 능숙하게 해왔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또렷하게 밝히는 경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수 년 간 좀 더 내게 맞는 일을 찾아다니며 여러 회사를 다녀봤음에도 일을 하며 즐거움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고, '좋은 회사'라는 것은 형용모순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다. 회사는 일과 삶에 대한 건강한 긍정 대신 회의와 경멸, 모멸을 주었다. 너무 쉽게 내게 나의 생활과 기질을 포기하라고 요구했고, 그에 응하지 않으면 개인주의자라 쓰고 이기주의자라 읽힐 얘기들을 수군거렸다. 열심히 일하고 일을 잘 해내었을 때 정당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았고 상사는 자신의 일과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였다.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실력 여부와는 관계없이 쉽게 고과를 주고 승진을 시켜주는 일이 다반사에, 일을 하지 않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소 허탈하게도 그간의 회사 경험들은 결국 내가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결론만을 안겨줬다. 회사에는 늘 소수의 좋은 사람들과 다수의 나쁜 사람이 있었고, 몇 안 되는 장점을 일거에 날아가게 만드는 단점들이 수두룩했으며 비상식적인 일들이 횡행했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견디기에는 나만의 도덕과 기준이 너무 뚜렷하고, 내가 원하는 일은 너무도 한정적이고 좁았다.




내가 겪은 일들을 구구하게 늘어놓았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듣게 될 대답은 아마도 "그래도 좀 참아봐라.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일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비정규직이 나 하나뿐도 아니고, 부당한 대우와 불확실한 미래를 견디고 사는 사람이 대다수니까. 하지만 나는, 나라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거절하고, 그럼에도 그 모든 게 통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전부였다. 그게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나인채로 사는 방법이었고 그게 내가 가진 삶의 윤리이자 직업에 대한 윤리였다.


돈도 좋고, 이름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알량한 도취감도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으며, 일과 회사에 헌신할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여러 번 부침을 겪고 나서야 '이제 회사원은 되지 않겠다'는 허약한 다짐을 스스로 얻어냈다. 서른 하고도 셋이나 더 먹어서 여전히 뭐가 될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는 내가 지나온 길 어디로도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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