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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Jul 17. 2020

#3 사육신의_이름으로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③

#3 사육신의_이름으로


사육신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남효온의 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 있는 「육신전(六臣傳)」을 통해서였다. 즉 정사에 기록된 것이 아닌 개인 문집에서 처음 언급된 용어였다. 남효온은 1489년 겨울에 경상도 의령에서 사육신의 절개를 기록한 「육신전」을 지었다. 주변 사람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라며 집필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육신전」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추강집』은 남효온이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지만, 당대에는 발간하지 못하다가 선조 대에 와서야 그의 외증손인 유홍이 발간하였다.    


「육신전」이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되는 것은 총 4번이었다. 

처음 등장은 「선조수정실록」 1576년 6월 1일자 기사였다. 우연히도 사육신이 거사 날짜로 잡았던 날과 그 월일이 똑같은 날이었다. 판서 박계현이 경연에서 이렇게 아뢰었다. “성삼문은 참으로 충신입니다. 「육신전」은 곧 남효온이 지은 것이니 상께서 가져다가 보시면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선조는 「육신전」을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크게 놀라 “엉터리 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先祖)를 모욕하였으니,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고 하교했다. 다행히 뒷날 영의정 홍섬이 입시하여 육신의 충정을 지극한 어조로 말하였는데, 몹시 간절하여 듣는 이가 측은하게 여겼으며, 선조도 노여움을 거두고 하교를 중지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며칠 후의 내용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었다. 

같은 달 24일의 기사였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날에 「육신전」을 처음 접한 선조가 책을 다 읽은 후 작심하고 내뱉은 말일 수도 있었다. 참고로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은 선조 대를 기록한 실록의 서로 다른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조선시대 실록 중 최초로 두 개의 실록이 존재하는 임금이 바로 선조였다. 원래의 실록인 「선조실록」은 광해군 대에 권력을 잡고 있던 북인 세력의 주도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일부 남인 포함) 세력은 북인이 만든 실록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서인의 주도로 실록이 수정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이 「선조수정실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서인들은 기존의 「선조실록」을 없애지는 않았고, 자신들이 수정한 「선조수정실록」을 별도로 편찬했다. 그렇기에 후대의 우리들은 선조 연간에 대해 각기 다른 정파가 만든 두 개의 실록을 비교하며 참고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실록」에 실린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선조가 「육신전」을 보고 나서 삼공을 불러 전교하기를 “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사람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 데도 떨린다”면서 “저 육신(六臣)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또 어째서 신발을 신고 떠나가서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라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고는 결국 “이들은 아조(我朝)의 불공대천의 역적이니 이들은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라며 본심을 드러냈었다. 다행히 이날 그 자리에 있던 삼공의 만류와 설득으로 이후에 일종의 필화 사건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선조의 말 중에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라는 표현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수양산에 은거한 후 고사리만 캐먹다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를 빗댄 말이었다.       


선조와 「육신전」 이야기는 야사인 『대동야승』의 「부계기문」에도 전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윤해평이 명종 초년에 「육신전」을 인쇄하여 반포하기를 청하자, 명종이 성을 크게 내며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선조 대에 와서 율곡 이이가 또 다시 같은 청을 하였다. 그러자 선조 또한 성내며 이르길, “집에 「육신전」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반역으로 논죄하겠다”고 했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이때 서애 류성룡이 나섰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은 바로 종료되었다. 당연히 선조의 노여움도 풀렸다. 그 말은 이렇다.      

“불행히도 국가에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신들이 신숙주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성삼문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사육신 공원, 사육신 묘

   

그런데 다른 문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등장한다. 

다만 그 등장인물이 김종직과 성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율곡 이이가 지은 『율곡전서』의 「경연일기」 편에 실려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예전에 김종직이 성종에게 “성삼문은 충신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성종이 놀라 낯빛이 변하였다. 그러자 김종직이 조심스럽게 “행여나 변고가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그제야 성종의 안색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이는 이 글의 말미에 “애석하다! 시종하는 신하로서 이러한 말을 임금 앞에서 아뢰는 이가 없었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쓴 이후에 앞서 말한 것처럼 선조 앞에 나아가 청을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후대의 왕들은 「육신전」에 대해 일종의 금지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1769년 영조 연간에 활동했던 남학명이라는 사람이 「장릉지(莊陵誌)」에 쓴 글에 이런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집집마다 「육신전」을 간수해 두고 외우다시피 했다.” 그래도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하는 노력은 간간이 있었다. 숙종 7년(1681)에 지금의 사육신 공원이 있는 산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 세운 신도비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사육신 공원, 신도비


익히 알려진 대로 사육신들은 현재 한강과 노량진역 중간에 있는 언덕에 조성한 사육신 공원에 잠들어 있다. 

일설에는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이 거열형을 받아 갈기갈기 찢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곳에 묻어주었다고도 하고, 어느 스님이 당시 죽임을 당한 사람 중 성승, 성삼문 부자와 박팽년, 유응부, 이개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묻었다고도 전한다. 사형을 명령한 세조조차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다”라고 감탄했던 그 충절은 비록 몇 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전혀 녹슬지 않은 채 후대의 마음속에 생생히 기억되고 있었다. 그 마음들을 모아 사육신 공원 담장에는 현대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인 함석헌 선생님의 글이 적혀 있었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엔 배울 것이 있다.’”


사육신 공원에서 바라본 한강철교와 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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