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⓻
조선 역사에서 세종은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일을 한 임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다 보니 세종 대에는 과로사한 관료가 많았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집현전이 있었다. 집현전이 일종의 집단연구체제였다 할지라도, 단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박팽년은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로 불렸을 정도로 경학, 문장, 필법 등 모든 면에서 탁월했다고 하니 세종으로선 그만한 일꾼도 없었을 것이다.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다는 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팽년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앞에 나서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했을 것 같다.
박팽년과 관련된 일화 중 특이한 것은 두 가지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 국문 과정의 일화였다. 박팽년 또한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하자,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박팽년은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일 년 동안) 충청감사로 있을 때 (장계와 문서 등에) 한 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세조가 박팽년이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니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었다. 화가 난 세조는 고문을 더 심하게 가했다. 그 때문일까. 박팽년은 다른 이들이 능지처참을 당하기 전에 감방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먼저 죽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박팽년은 ‘신(臣)’자를 쓸 자리에 일부러 ‘거(巨)’라는 글자를 썼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의 자손과 관련된 이야기다.
사육신은 집안사람 중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문지화를 당했기에 집안의 남자들은 아들, 손자 할 것 없이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사육신 집안의 대는 모두 끊기게 되었다. 그런데 박팽년의 집안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야사에 의하면, 그 사연인즉 이렇다. 당시 박팽년의 둘째며느리가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고향인 대구로 귀양을 가서 관비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만에 하나 그녀가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고 명령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곧 죽게 될 판국이었는데 다행히 박팽년 집안의 종 가운데 비슷한 시기에 낳은 딸이 있어 서로 자식을 바꾸고 이름을 박비(朴斐)로 지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비가 17살이 되었을 때인 1472년에 아버지의 동서였던 이극균의 권유로 자수를 하니, 당시 임금이었던 성종은 ‘오직 하나뿐인 산호보석 같은 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일산(壹珊)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선조실록」(1603년 4월 21일)에도 있었다.
태안군수 박충후가 탄핵을 당한 기사였는데, 그 말미에 탄핵받은 박충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박충후는 문종조의 충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조가 육신(六臣)을 모두 주살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박비는 유복자였기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에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이고 이름을 비(斐)라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이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박팽년을 ‘충신(忠臣)’이라고 적시한 점이다.
사육신이 복권된 것은 한참 더 지나 숙종 대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조실록」을 작성한 사관들은 이미 충신으로 기록했다. 이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이미 남효온의 「육신전」이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읽히게 되었고,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과 관계없이 사대부들 중 상당수가 사육신을 충신으로 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원한 불사이군의 충신 박팽년이 죽기 전에 쓴 ‘절의가’가 전하고 있다.
당시 세조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듯, 박팽년에게 ‘하여가’를 읊어 시험하게 했다고 한다. 그때 박팽년은 이렇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