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과 김육 그리고 대동법
흔히 대동법의 두 주역은 이원익과 김육이라고 한다.
어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문득 김육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평택에 있는 ‘대동법시행기념비’를 찾았다. 양반 지주들(모든 관료들도 여기에 해당한다)과 중간 방납업자들(정경유착 세력들이다)의 극심한 반대(이들은 근래의 종부세 반대세력보다도 더 격렬하게 반대했다)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에 헌신했던 이가 김육이었다.
머리 처박은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 없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노구의 김육은 대동법 확대를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당시까지 경기도에만 실시되고 있던 대동법이 마침내 충청도까지 확대되었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당시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이원익에 의해 경기도에 뿌리내린 대동법은 김육을 거치며 물꼬를 트기 시작해 정확히 100년이 지나서야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확대되었다. 백성들이 원하는 게 실현되기란 예나 지금이나 이리도 지지부진한 듯싶다.
혹 근처를 지나시걸랑 잠시 인사나 드리고 가시라.
그리고 한때 충청감사를 지내기도 했던 김육의 노력에 충청도 백성들은 비를 세워 보답했다. 지금도 아산 신창과 익산 함열에 김육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비록 비석 하나이지만, 거기에 조선 후기의 가장 중요한 조세 정책이 잠들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서 그 잠을 깨워야 종부세도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