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의 누가 되든 너무 애쓰지 않길
<세계의 주인>은 '윤가은'의 영화 중 가장 냉정하고 현실적인 작품이다. 이전의 <우리들>이나 <우리 집>이 관계 안에서 상처받는 아이들의 세계를 다뤘다면, 이번 영화는 관계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찍는다. '주인'이는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야 하는 경계에 있는 청소년으로, 이미 어른의 폭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윤가은'은 이 시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보호자가 없는 세계, 즉 책임이 생겨버린 인간의 세계. 아이가 아닌 인간의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시간"을 보여준다.
'주인'이가 서명운동에서 서명을 거부하는 장면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거부하며 내뱉는 "틀린 말 고칠 때까지 못한다" 말속에는 사실 "너희가 뭔데 정의하려 하느냐, 진짜를 아느냐"라는 말이 숨어 있다. 네가 겪어보지 않았고, 간접적으로든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왜 나를 말로 묶느냐는 항의다. 서명 운동은 정의로운 행동이겠지만, 사실은 참여자의 안심일 뿐이다. "이거 하나 해놓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거나 자부심이 들겠지." '주인'이는 그 안일함을 꿰뚫어 본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분노의 형태다. '주인'의 봉사 단체 멤버인 '미도'는 재판 장면에서 분노하지 않는다. 변호사가 피해자의 말을 꼬아 묻고, 본질을 흐리는 질문으로 그녀를 공격하지만, 그 앞에서 싸우지 못한다. 하지만 봉사 단체 장면에서는 폭발한다. 그건 누구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오래 쌓인 감정이 임계점에 다다라 넘쳐흐르는 순간이다. '주인'이는 그녀의 폭발을 지켜본다. 자신이 서명 거부로 표현한 감정이, 누군가에게서는 저렇게 터질 수도 있음을 안다. 침묵과 폭발, 그 두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다.
'윤가은'은 이 영화에서 폭력을 재현하지 않는다. 재현은 쉽지만 이후를 찍는 일은 어렵다. 그 이후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과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리듬은 느리다. 감독은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라는 태도로 감정을 방치한다. 그 방치는 서사의 결함이 아니라 현실의 반영이다.
'해인'은 영화 속 가장 작은 파편이다. '주인'의 동생인 '해인'은 어리지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누나의 일, 엄마의 침묵, 집안의 공기까지.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를 결국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엄마는 어린이집 원장이지만, '주인'이때처럼 '해인'이도 방치한다. 돌봄의 직업을 가진 어른이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그 부재 속에서 또 다른 피해의 씨앗이 자란다. '해인'은 그렇게 정리된 세계 바깥에 남겨지는 아이이자, 또 다른 시작점이 된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은 선언이 아니라 질문처럼 들린다. 누구의 세계인지, 어떤 세계인지, 그 앞이 비어 있는 느낌이다. "멋진 세계의 주인", "사랑이 가득한 세계의 주인", "폭력적인 세계의 주인" 등 무엇이든 붙일 수가 있다. 마치 그녀의 장래희망처럼 말이다. 어떤 말이 붙든 그건 '주인'이의 몫이다. 우리도 우리의 "OOO 세계의 아무개"로 살아갈 것이다. 세상이 늘 타인의 상처에 이름을 붙이려 하지만, '주인'이의 세계에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았다. 그것은 앞으로를 살아낼 '주인'이의 몫으로 남는다.
팟캐스트 https://www.podbbang.com/channels/8398/episodes/25198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