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발소리, 끝나지 않는 트라우마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확실성과 아이러니 위에 세워진 영화다. 개를 치는 단순한 사고는 어느새 한 남자의 인생을 뒤흔드는 심판의 서막이 된다. 그는 의족 발소리 하나로 과거 고문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피해자들은 모두 고문관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남은 기억은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은 그를 붙잡아 분노를 쏟는다. 결국 영화는 특정 인물의 죄를 밝히는 대신, 트라우마가 어떻게 새로운 폭력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긴장감은 직접적인 고문 묘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발소리 같은 작은 단서, 모호한 증언, 불확실한 시선이 관객을 끝내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특히 피해자들이 모여 그가 맞는지 아닌지를 끝없이 논쟁하는 장면은 희극적이면서도 섬뜩하다.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집단적 분노는 점점 커진다. 그들이 단죄하려 한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들이 벗어나지 못한 상흔과 기억이었다. 이 아이러니는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마지막에 들려오는 발소리가 그 모든 것을 응축한다. 납치된 남자의 것일 수도, 진짜 고문관의 것일 수도, 지나가는 절름발이의 것일 수도, 아니면 환청일 수도 있다. 정체가 무엇이든, 트라우마는 여전히 계속된다. 피해자에게 폭력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발소리는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현재를 갉아먹는 공포로 남는다.
'파나히'는 이 영화를 통해 특정 사건을 재현하지 않는다. <남영동 1985>가 실명과 사실 고증으로 국가 폭력을 고발했다면, '파나히'는 기억의 파편, 집단적 증오, 불확실성의 공포를 통해 트라우마 자체를 드러낸다. 그는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오직 제도와 법이 부재한 자리에서 분노와 불확실성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으로 변하는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법이 부재할 때, 증오와 트라우마는 누구든 희생양으로 삼아 버릴 수 있다는 정치적 알레고리로 확장된다.
"사고였을 뿐"이라는 제목은 체제가 폭력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방식을 풍자한다. 사고로 치부되는 순간에도 피해자들의 귀에는 여전히 발소리가 들려온다. '파나히'는 이 영화를 통해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그저 사고"가 아니라 구조이며, 끝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라는 것을.
팟캐스트 : https://www.podbbang.com/channels/8398/episodes/25194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