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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다 Jun 28. 2023

관계의 정리

너의 역할은 거기까지야. 그것만으로도 "고마워"라고 이젠 말할 수 있어

Photo by Tom Jur on Unsplash



#1

 나에게 '친밀한' 이란 기준은 상당히 높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나에게 무해한 사람이어야 하고,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20대 때야, 몇년 간의 관계가 학교 내에서 이어졌지만 그 이후로의 생활에서 관계의 지속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추억 뿐이고, 현재의 각기 다른 라이프 사이클,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데 어떻게 마음 한켠을 온전히 누군가를 위해 늘 마련해 둘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난 그런 관계만이 진실한 관계라고 믿었다. 그 외의 관계는 전부다 피상적이고, 가식적이라며 혼자 상처받고 아파하고, 씁쓸해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진심으로 만날 수 없었다. 실망이 계속되다 보니, 차라리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게 나는 점점 혼자가 되었다.




#2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봄날의 햇살 같은 친구가 나에게 다가왔다. 잘 알지도 모르고 같이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점심시간에 스쳐가듯 이야기를 했는데 결이 잘 맞다고 생각했다. 그 바이브에 이끌렸다. 그리고 좀 더 많은 것을 공유하게 되었고, 내 오래된 잠든 세포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했고, 웃기를 좋아했고, 밝았고, 상처를 온전히 받아도 괜찮은 나. 그대로의 내가 깨어났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었다. 아무튼 나는 더 이상의 인간 관계에 대해 미련도 없고,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굳게 닫은 상태였는데 그날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그 친구는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했다. 그 특유의 바이브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 밝은 웃음이 회색빛으로 된 우리 사회에서 보기 힘들기 때문일까. 이제는 나이도 먹었고, 관계에 대해 상처도 받았고, 그래서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또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지?"


 아니나 다를까, 얼마 되지 않아 (예전같았으면) 큰 상처를 받을 만한 사건이 바로 생기고 말았다. 친구사이의 친밀함이라는 것도 연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고 준 만큼 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 너무도 갑자기 좋아하는 존재를 만나고 나니 기대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고, 그래서 실망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생각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왜냐면 나는 누군가를 소유할 수 없으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소유될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너무 당연한 이유인데 이제야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뭐랄까. 그 친구는 그냥 그 순간의 나의 잠든, 죽어있던 세포를 깨워준 것만으로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을 안겨준 너무너무 고마운 귀인이다.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그 친구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실망하더라도, 그것만큼은 꼭 기억해야 한다. 죽어있던 나를 다시 깨어나서 밝게 살 수 있게 깨워준 귀인이라는 것을. 내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소중한 귀인. 설사 여기서 인연이 정리된다 해도 그 고마운 마음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3

 그러다보니, 다른 관계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돌아보면 너무도 많다. 연락이 안되는 사람도 있고, 멀어진 사람도 있고, 다시 못볼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의 기억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가시가 마음을 쿡쿡 찌르는 것 처럼.


 하지만, 그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주었던 감사한 소중한 순간들, 추억들. 그것으로써 그 사람은 내 인생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해준 것이 아닐까. 그것만 기억해도 참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모두가 시간과 정도의 차이일 뿐, 나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인데 조금이라도 나에게 그런 순간을 줬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고맙다 생각하며 내 인생의 귀인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좋게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밉고 미웠던 사람들도, 결국엔 어느 역할을 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받을 상처 미리 받아서 연습을 할 수 있게 도와줬던 거라고. 어쩌면 그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못만났을 고마운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도 그냥 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그 사람의 역할을 다 하고 내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 뿐이다. 미워할 필요가 없다. 지나가버리는 사람이니까.





#4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사람들이 있다.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숨을 쉬고. 자그마하지만 나의 일상을 일부 함께 하고, 함께 웃을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인생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오롯이 느낀다는 것은 인생에 충만함을 더해준다.


 너무 미워할 것도, 너무 사랑할 것도 없다는 법정 스님의 글이 생각나는 그런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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