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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May 01. 2022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Film 3]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대만 2020, 류광휘

(*퀴어 영화입니다. 불편하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 주세요.)



올 2월 말, 남편과 나는 어디론가 가야 했고 생전 처음 와 보는 지하철역에 내렸다. 남편에게도 초행길이라 우린 출구로 나오자마자 옆쪽으로 비켜섰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는 남편 곁에 서서 역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하철역 출구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곳에 꽃과 신문을 파는 작은 가게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익숙한 커피 체인점이 있었다.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우리와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꿀이 뚝뚝 흐르는 커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곧 지하철을 타고 떠나야 하는 듯 보였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도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이 애타게 엉겨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꿀이 한두 스푼 떨어지는 게 아니라 양봉장 수준으로 꾸덕꾸덕 흐르던 그 커플은 곧이어 이별의 키스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키스가 아닌 여러 번의 뽀뽀.


속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까운 곳에 가는 게 아니라, 비행기나 유로스타를 타고 멀리멀리 떠나는 걸까’라고 짐작하면서, 그들만 빤히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들은 동성 커플이었다. 누군가 내게 ‘동성 커플이라 애정 행각을 눈여겨본 건가요?’이라고 날을 세워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아니다.


일부러 다른 곳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커플의 이별 풍경이 자꾸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그들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지하철역 앞에서 자석처럼 바짝 붙어 서서 하나는 떠나가지 못하고, 다른 하나는 보내주지 못하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난 스물아홉부터 외국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성 커플의 애정 행각을 보는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것도 잠시, 그들이 내게 준 느낌은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이 두 마디뿐이었다. 내 눈앞에 사실로 버젓이 존재하는 이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하면 대체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대만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내가 대만에서 지낼 당시 일어난 변화였다. 실제로 교복 입은 동성의 학생들이 손잡고 다니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는데, 사회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느낌이라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한순간에 자리 잡았을 리는 없을 터. 이 영화는 동성애를 향한 차별이 만연했던 1987년 대만의 모습을 담았다.


천주교 고등학교의 악단에서 처음 만난 장자한과 왕바이더. 전학생인 왕바이더는 자신을 '버디'라는 이름으로 소개한다. 악단을 지도하는 신부님의 주도로 폐활량 훈련을 하기 위해 수영장에 모인 자한과 버디는 알 수 없는 끌림에 서로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쌓아 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져 가는 사랑의 감정을 인정할 수 없는 자한과, 여자를 좋아하는 척하며 자신의 삶 자체를 연기하는 버디. 한 겹씩 켜켜이 쌓여 가는 그들의 감정을 예리하고 분명하게 포착해 낸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영화 중반부의 샤워실 장면은 가장 수위가 높은 장면이기도 했지만, 가장 마음 아픈 장면이기도 했다.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상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미안하다' 말하고 서로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엉엉 울던 두 소년의 사랑이 어찌 '병'이겠는가.


30년 후,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 몬트리올을 찾은 자한은 그곳에서 우연히 버디와 만나게 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밤거리를 걸으며 '그때는 게이인 것이 밝혀지면 목숨이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이제는 길거리에서 목 놓아 소리쳐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며 멋쩍게 웃는다. 자한을 위해 자한을 밀어내기만 했던 버디는 그제야 '그때 너를 많이 사랑했다.'는 차분한 고백을 한다.



어린 자한과 어린 버디를 수화기 너머로 울게 만들었던 노래의 멜로디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고등학생인 자한과 버디를 요즘 세상으로 옮겨 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시기를 보내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대만이 아니라 한국이어도 괜찮을지 생각했다.


간절히 바란다, 한국이어도 괜찮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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