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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Mar 08. 2019

사랑하게 될 사람에게

오키나와의 특별한 선물 가게

6. 어쩌면 지금 새로운 사랑을 간절히 소망할지도 모를 당신에게


“당신의 이름이 들어갈 공간은 비워 뒀어요. 빈칸은 다음에 함께 와서 채우세요.”

목걸이를 조심스레 내 손바닥 위에 올리며 그가 말했다. 무척 상냥한 목소리였다. 나하 시 국제 거리 안쪽, 스물네 걸음이면 끝까지 갈 수 있다고 하여 24보 도로라 이름 붙여진 작은 골목을 지나다 발견한 잡화점 하마키치(HAMAKICHI)를 둘러보던 중 마음에 쏙 들어 구입한 것이다. 네 개와 다섯 개의 사각형이 연달아 교차하는 이 문양에 인연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섬사람들의 맘씨가 담겨 있다는 그의 말에 깜빡 넘어갔다. 손톱만 한 펜던트를 뒤집어 보니 오늘 날짜 그리고 내 이름이 삐뚤빼뚤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엔 이름 하나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고 빙긋 웃었다.


- ‘어쩌면_할 지도’ 본문 .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연인이 선물이라며 올려놓은 묵직한 종이 가방. 워낙에 많아서 이제 모두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사진이 있는 엽서와 현지 유명 브랜드의 핸드크림, 병정 모양으로 만든 책갈피, 아티스트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는 수첩, 도시의 이름과 전망대 풍경이 그려진 천 가방, 포장에 호텔 사진이 인쇄된 초콜릿 등이 어지럽게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녀는 상점과 전망대의 이름, 브랜드의 역사, 선물의 이유들을 들려줬습니다. 그 시간이 선물 못지않게 고마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윽고 종이 가방 속 물건들이 테이블 위에 모두 옮겨지고 난 뒤 그녀가 했던 말도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너를 떠올리고 그리워했다는 의미야.”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그 사랑이 안기는 가장 큰 쾌락에 취합니다. 거리와 공원이 한 가지 색으로 물들고 스쳐 지나는 모든 것에서 똑같은 향이 나죠. 머릿속엔 종일 몇 줄의 문장들이 빙글빙글 돕니다. 상자에 담기는 것은 그의 취향이고 우리가 나눴던 대화이며 차마 말로 하지 못했던 고백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말하는 선물의 숨은 의미 같은 비밀 아닌 비밀을 슬쩍 끼워 넣기도 하고요. 제법 긴 시간과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만 누구도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선물과 함께 건네게 되죠. “종일 함께 있는 것 같아 기뻤어.”라고.


 사랑하는 이가 아닌, 훗날 사랑하게 될 이를 위한 선물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요. 둘은 다르지만 닮은 구석이 있고, 멀어 보이지만 곧 닿을 거리에 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색과 향이 제 취향으로 바뀌고, 우리의 대화가 있던 자리를 요즘 내 관심사가 채우죠. 고백이 적힐 칸은 생각해 뒀던 문장으로 우선 끄적여 둡니다. 떠오르는 얼굴이 없는 서운함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는 즐거움으로 메워지니 충분히 설레고 고마운 일이더군요. 전자를 지난 연인을 통해 배웠다면, 후자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액세서리를 판매한다는 작은 잡화점에서 배웠습니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번화가인 나하(那覇) 시 국제 거리. 길이가 1마일에 달해 ‘기적의 1마일’로 불리는 이 거리에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상점과 식당, 펍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그들이 밝히는 조명과 끊임없이 모여드는 인파로 밤낮이 따로 없을 정도죠.

 하지만 대로 안쪽의 골목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꽤나 달라집니다. 초입에는 대부분 상점들이 늘어서 있지만 사, 오분만 파고들어도 관광객과 화려한 조명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편한 차림으로 장 보러 나온 동네 사람들과 오래된 건물, 낡은 간판들이 정겨운 시장 풍경을 연출하죠. 나하 시에 머무는 동안 이 골목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건물 모퉁이를 터서 만든 근사한 카페와 오래된 장난감을 파는 한 평 남짓한 보물섬, 그리고 특별한 잡화점 하마키치를 발견했습니다.


 잡화점 하마키치로 찾아가는 길은 흡사 어드벤처 게임의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 같았습니다. 국제 거리의 제일 마키시 공설 시장(第一牧志公設市場)에서 미로처럼 좁은 골목을 몇 개 통과한 뒤 24보 도로에 닿았습니다. 바닥에 띄엄띄엄 발자국 그림이 붙어있는 것을 보니 스물네 걸음이면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다 하며 붙은 이름인 것 같습니다. 잡화점 하마키치는 이 골목에 있습니다 창 밖으로 새어 나오는 색색의 빛도 빛이거니와 ‘세상에서 하나뿐인’이라는 말에 누구라도 걸음을 붙잡힐 수밖에 없어요.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무언가를 만들던 주인이 고개를 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한 눈에도 무척이나 푸근한 인상이라 기분이 좋았어요. 짧은 눈인사를 건네고 분주하게 가게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창 너머로 볼 때보다 더 많은 액세서리들이 저마다 다른 빛을 내며 좁은 가게 안을 환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반지와 목걸이 등의 금속 액세서리부터 나무, 조개 공예품까지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취급하고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만드니 비슷하지만 똑같은 건 하나도 없답니다.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기념품을 팔고 있는 국제 거리의 상점들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라 빈 손으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게 안에 있는 물건들을 더욱 유심히 봤습니다.


 주인에게 추천을 부탁하니 이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라며 선반에 놓인 손톱만 한 펜던트를 가리킵니다. 네 개와 다섯 개의 네모가 교차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끝없이 반복되는 문양처럼 인연이 영원하길 기원하는 섬사람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흡사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상징인데,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능숙한 말솜씨는 아니었지만 진심이 느껴졌거든요.


 몇 분의 고민 끝에 네모 문양이 노란색으로 채워진 펜던트와 벽에 걸린 밤색 줄을 골랐습니다. 재료를 건네받은 주인은 둘을 작업대에 놓더니 몇 번의 손짓과 망치질로 금방 목걸이를 완성해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펜던트 뒷면을 보니 오늘 날짜와 제 이름이 위쪽에 바짝 붙어 새겨져 있더군요. 아래가 휑하게 비었다 싶었는데 눈치 빠른 주인이 제가 채 묻기도 전에 그 이유를 설명해 줬습니다. 다음에 목걸이의 주인과 함께 오키나와에 오게 되면 꼭 다시 들러달라고, 그때 빈칸을 그분의 이름으로 채워 드리겠다면서요. 반할 수밖에 없는 마음씨 아닌가요?


 제 취향과 마음을 담아 고른 사랑할 이를 위한 선물. 새로운 설렘과 행복을 안겨준 목걸이는 아쉽게도 아직 제 서랍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 봄에는 그 주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꿈을 꿔 봅니다. 함께 잡화점을 찾아 빈칸에 그 사람의 이름을 새기며 이만큼 널 기다렸노라 고백하는 상상도 함께.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물론 일주일에 사나흘 그것도 오후 시간 동안 잠시 문을 여는 여유마저 이 섬과 무척 잘 어울렸던 가게, 언젠가 다시 갈 수 있겠죠?


주소 : 3 Chome-3-8 Makishi, Naha-shi, Okinawa-ken 900-0013

전화번호 : 098-861-8090

홈페이지 : http://www.hamakichi.net

영업시간 : 월/금/토/일 AM 10:00–PM 6:00, 화/수/목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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