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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Dec 31. 2021

마흔 즈음에

나는 이제야 서른이 되려나 보다

 다사다난(多事多難) 그리고 호사다마(好事多魔). 이맘때면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 어디 별일 없던 해가, 수월했던 날이 한 번이나 있었냐만은 늘 올해는 유독 분주히 냉온탕을 오간 시간이었다며 서로를 격려하곤 한다. “2021년 한 해는 진짜 정말, 진심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2021년의 수많은 사건들 중 유독 마음을 흔든 것을 꼽자면 관수동 서울극장의 폐점 소식이다. 1978년부터라니 4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다. 한때 종로 바닥에서 가장 붐볐던 극장이 8월 31일을 끝으로 사라진다는 공지에 왜 그리 가슴이 시리던지. 어떤 노래 가사처럼 조금 더 일찍 그녀를 보기 위해 조조할인 핑계를 댔던 추억이 내게도 있었다. 갓 스무 살이었던 소년은 이제 마흔을 하루 앞두고 있다. 2021년 12월 31일.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다.


 어제부터 달력을 보며 손가락 접고 펴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2022 빼기 1983의 답을 확인 또 확인하지만 결과가 바뀔 리 만무하다. 오늘은 내 삼십 대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부로 사십 대가 된다. 자연스레 -정말 자연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십 대의 끝자락을 돌아본다. 출입문 앞까지 사람으로 가득 찬 퇴근길 140번 버스에서 손잡이 감싸 쥐고 본 한남대교 야경을 떠올린다. 그날 나는 스스로를 퍽 대견해했다. 창에 비친 모습이 그토록 바랐던 회사원 같다는 것에, 누구들처럼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를 읊으며 낼모레 죽을 것마냥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에. 또래보다 많은 것들이 이미 늦었음에도 내게 서른 그리고 삼십 대는 기대뿐이었다. 머잖아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란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 해야 할 것들을 적었던 게 십 년 전 오늘이다.


 당연히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던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십 년 중 몇 년을 회사원으로, 몇 년은 여행가나 사진가로 살았다. 요즘은 가끔 작가님 소리를 듣는 허울 좋은 백수로 지낸다. 도망치듯 떠난 여행이 삶을 바꿀 것을, 그 급격한 변곡선을 어떤 날의 내가 예상이나 했을까. 빌어먹을 코로나19로 발이 묶이고, 직업이 증발 하리란 것은 또 어떻고. 인생에 적어도 한 번은 좋은 기회가 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적 같은 일들도 일어났다. 덕분에 그럭저럭 뜨거워 봤고, 적당히 아프기도 했던 삼십 대였다. 몇 달 전 간지럽기 그지없는 문장으로 스스로에게 생일 축하를 했던 것을 보면 남부럽지 않을 만큼은 아니어도, 여한 없을 정도는 되지 않을지.


“너는 서른이 참 잘 어울렸다. 서른넷, 서른여덟도 그리고 서른아홉까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스물아홉이 뜨끔함이었다면 서른아홉은 철렁함이다. 나 포함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또래들의 뒷모습에서 시샘을 느끼고, 친구들의 얼굴에서 어릴 적 내 아버지 어머니의 표정을 발견할 때 특히 그렇다. 내가 중학생 때 아버지의 나이니 무리도 아니다. 거기에 몇 살 어린 이들까지 나를 앞질러 저만치 나간 지 오래다. 한편으로 그들이 대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원망한다. 다들 순순히 흐르는데 왜 나만 제자리일까, 하고. 모르긴 몰라도 조금씩 느리게 가던 내 시계가 이제야 겨우 십 년 전, 서른 즈음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라는 가사를 이제야 흥얼거리는 것을 보면, 그때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자꾸만 발목에 엉겨 붙는 걸 보면.


 그게 정말이다 싶은 것이, 서른아홉의 마지막 날에도 내가 생각해 낸 거라곤 다시 몇 개의 소망을 수첩에 적어 두는 일이다. 내가 되고 싶은 사십 대의 모습, 마흔아홉 살까지 머물고픈 삶, 더 늦기 전에 겪어야 할 사건들 등 남들이 서른 언저리에 할 법한 그리고 나 역시 해 보았던 것들을 마흔 즈음에 다시 한번 새겨 본다. 그러니 기분만큼은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바닥난 잔고보다 고갈되고 있는 호기심이 걱정인 어른’으로. 두 번째 서른으로.


 언젠가 지중해 위에서 오롯이 하루를 보낸 날, 사방으로 펼쳐진 망망대해를 보며 나는 이 순간이 생의 어느 지점인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봐야 아마 절반쯤 왔겠지, 하며 추측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만약 그때 내가 이 바다의 일부라는 사실에, 파도를 타고 때로는 헤치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좀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이제라도 좌표 따위 잊고 이 긴 항해를 즐기기 시작하면, 그러면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나는 이제야 서른이 되려나 보다.



202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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