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어, 더 열심히 놀래.
맨해튼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종종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을 본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행동, 지하철에 들고 타는 물건들, 여기서 만날 것이라 생각 못 했던 동물 등 대체로 기괴한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지상/지하 가리지 않고 펼쳐진다. 한동안은 신기한 광경을 넋 놓고 봤지만 어느 날부터는 옆에 있는 누군가와 낄낄대며 “온리 인 뉴욕(Only in New York)”이라 주고받거나 혼잣말 내뱉고 가던 길 가게 되더라. 석 달이 짧은 시간은 아니니. 그럼에도 어떤 것은 너무나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12월 9일 토요일 아침 풍경이 그중 하나다. 눈앞을 활보하는 수백의 산타와 루돌프들을 보면서 내가 아직 잠에서 안 깼나 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어 봤으니.
늦잠 늘어지게 잔 뒤라 몽롱함에 더 그랬을 게다. 전날엔 크리스마스 마을 다이커 하이츠에 다녀왔다. 까만 밤을 잊게 만든 화려한 조명과 장식들, 시끌벅적한 동네 분위기야 두고두고 얘기할 정도로 좋았지만 몸은 녹초가 돼 버렸다. 브루클린 다리부터 베라자노 내로스 다리까지 12km가 넘는 거리를 걸어갔으니. 그때야 여행의 낭만이니 여유니 다 좋았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게 걷긴 했다. 올 땐 지하철을 탔어도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불도 켜 둔 채 곯아떨어졌다. 끙끙 앓는 내 신음 소리를 잠결에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삼주만에 처음으로 아홉 시 지나서 눈을 떴다. 만사 다 귀찮은 맘에 하루 쉴까, 나갈까 삼백 번쯤 고민하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사다 둔 라면이 떨어졌고 냉장고는 비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칼과 몸뚱이에 대강 비누칠하고 닦아낸 뒤 벗어둔 청바지 그대로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몇 분 남지 않았다.
내가 빌린 아파트는 타임 스퀘어와 가까운 헬스 키친에 있었지만 서쪽 끝 허드슨 강변에 있어서 대체로 한적했다. 타임 스퀘어까지 서너 블록을 가는 동안 마주치는 몇몇 사람들도 거의 정해져 있어서 나중엔 가볍게 인사 나눴을 정도. 세탁소 앞에서 한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 통화 중인 아저씨, 판다 익스프레스 앞에서 배달 주문 기다리는 청년들. 의자에 앉아있는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욕을 해댔다. 그것도 활짝 웃으면서. 하지만 그날은 첫 번째 코너부터 시끌시끌한 것이 분위기가 좀 달랐다. 저 멀리 빨간 옷 맞춰 입은 한 무리가 까르르 웃으며 길을 건넜다. 자세히 보니 방울 달린 모자와 흰 털 장식이 산타 클로스 복장 아닌가. ‘허허, 청년들 열정이 대단하구먼. 간밤에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파티라도 한 건지.’ 그저 재미있는 친구들이라 생각했는데 타임 스퀘어에 가까울수록 붉은 옷 입은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영문을 알 수 없던 나는 눈가를 비비며 이 상황을, 눈치를 살폈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산타콘(SantaCon)이란다. 그래, 본 적이 있다. 뉴욕 크리스마스 시즌 중에 사람들이 산타와 루돌프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날이 있다고. 199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돼 1998년부터는 뉴욕에서도 열리는 이 행사는 산타나 루돌프, 엘프 복장을 하고 종일 흥청망청 술 마시고 춤추며 하루 제대로 망가지는 것이 목적이란다. 물론 시작은 꽤나 거창하다. 크리스마스가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고 소비를 조장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에 반발해 자선 단체에 기부할 돈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사람들이 지정된 술집에 입장하기 위해 낸 참가비와 입장료가 그것이다. 물론 이 역시 변질돼서 취객의 행패와 각종 폭력 사건들로 문제가 된 지 오래라는 말이 바로 따라붙는다.
설명을 읽으면서, 사진을 보면서도 그저 몇몇 익살꾸러기들의 이벤트겠지 했는데 실제로 보니 분위기며 열기가 상상 이상이었다. 타임 스퀘어 42 스트리트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주변 몇 블록이 멀티 유니버스의 산타들에 점령된 것처럼 보였을 정도. 이후로도 쭉 느낀 것이지만 이 사람들 노는 것에는 정말 진심이다. 그리고 뉴욕에선 하루도 뭔가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다. 지난 열흘만 해도 추수감사절부터 여기저기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 다이커 하이츠 시즌 개막 그리고 산타콘까지 쉬는 날이 없었다. 모인 사람들 모두 열과 성을 다해 놀고 즐기는 것은 물론이고.
어쨌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내게는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이 그야말로 장관이자 절경, 신이 주신 선물이었다. 골목마다 빨간 물결이 가까이 또 멀리 파도를 치고 시끄럽긴 또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손목에 찬 애플 워치에서 자꾸만 소음 경고를 보냈다. 처음 집 앞에서 산타 복장의 남녀 무리를 봤을 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사람들의 익살스러운 축제라고 생각했지만 설명을 보고 나서 그런지 산타들의 일탈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호등에 기대 하얀 턱수염 탈까 손으로 쥐고 뻐끔뻐끔 담배 피우는 산타, 가게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길에서 맥주 캔 들고 ‘치얼스’ 외치는 산타와 루돌프 패거리들. 이러다 앞으로 산타 클로스를 떠올릴 때마다 이들의 모습이 보일 것 같단 생각에 한편으로 아찔해졌다. 그래 뭐, 이 역시 어른이 되는 과정이겠지만. 물론 유쾌한 모습이 더 많았다. 99센트 피자집 앞에서 얼굴보다 큰 피자를 뜯어먹는 반라의 산타 누나들, 카메라를 든 내 앞을 막아서고 이날을 위해 준비한 복장과 장비들을 찍어달라는 사람들 덕에 나도 금방 그것도 공짜로 즐거워졌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빨간 스웨터 하나쯤 미리 챙겨 둘 것을.
참가비도, 드레스 코드도 맞추지 않았지만 메인 무대가 맨해튼 길바닥이었던 덕에 나도 두어 시간 이 골목 저 골목 쑤시고 다니며 곁다리나마 축제를 즐겼다. 빨간 옷 입은 사람들 보이면 말 한마디라도 나눠 볼까 쫓아가 보고 술집, 식당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앞을 어슬렁대기도 했다. 메이시스 백화점 근처 대로변을 지나가다간 한바탕 벌어진 춤판에 입이 떨 벌어졌다. 예쁜 장식들을 지저분하게 두른 트럭 위에서 춤사위를 뽐내는 여성들 그리고 오이 탈 뒤집어쓴 사내를 리더 삼아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췄다. 기둥에 기대 감상하던 나도 어느새 어깨를 들썩들썩. 그래, 이게 내가 기대했던 뉴욕이고 맨해튼이지.
마냥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던 풍경에 조금 적응했는지 빨간 옷이 감싸고 있는, 오늘 하루 우스꽝스럽게 망가지고자 모인 사람들의 표정들이 하나씩 보였다. 다 큰 어른들 아니 노인들의 미소마저 어찌나 맑던지. 이 정도면 굳이 진탕 취하지 않더라도 오늘이 있어야 할 이유는 충분할 것 같다. 결국 이렇게 한 번 더 웃기 위해 사는 거니까. 어제까지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사는 이유도, 더 많이 자주 웃고 싶어서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양 옆에 있는, 앞뒤로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부러웠다. 나는 이 사람들처럼 뭔가에 이렇게 열정적이었던 적이 있던가. 아니 이토록 열심히 놀아본 적이라도 있었나. 당장 오늘도 구석에서 무게 잡고 남 일 보듯 구경만 하고 있으니. 갑자기 지난 사십 년이 너무너무 아까워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벌써 12월도 삼분의 일이 지나지 않았는가. 주제에 맞지 않게 나는 너무 어른이 돼 버렸다.
집을 나서자마자 산타콘에 빨려드느라 밥 먹는 것도 잊고 어둠을 맞았다. 근처 버거집을 찾아 걷는 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다. 늦잠 중에 꾼 꿈처럼 오후의 산타콘을 곱씹으며 더 늦기 전에 내일부터 조금씩 가벼운 사람이 되기로 다짐해 보았다. 가능하면 내년 이맘때까지 왜 이렇게 촐랑대냐는 말을 들어 보기로.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다. 저녁 먹고 집에 가기 전엔 타임 스퀘어에 들러 환호하는 척 소리라도 한 번 꺅 질러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