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몰랐을까, 쇼핑도 여행의 기록인데.
길어야 이삼 분인데 양치하는 시간은 왜 그렇게 무료한 지. 그 새를 못 참고 왼손에 든 아이폰으로 이것저것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찾는다. 보통은 오늘의 주요 뉴스, 어미새들이 물어다 주는 특가 쇼핑 정보다.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으면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에 접속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의 일상을 구경하는 것이 시간 보내기 더없이 좋은데 오늘따라 블랙프라이데이 타령하는 광고가 태반이다.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는 광고들 피해 ‘메모리’라는 아이콘을 누르니 작년 오늘, 뉴욕 여행 첫날 내가 올린 게시물들이 나왔다. 호텔 침대에 누워 만든 뉴욕 버거투어 1차 리스트. 아끼는 코트 챙겨 입고 찍은 #OOTD 사진. 그때 생각이 떠올라 반가웠다. 여권 잃어버리기 전이라 그런가 내 표정도 해맑은 것 같고.
‘그러고 보니 작년 블프 땐 뉴욕에 있었는데.’
추수감사절과 상관없는 이방인에겐 화려한 메이시스 퍼레이드가 홀리데이 시즌을 알리는 축포와 같았다. 이날부터 1월까지 긴 축제가 도시 전체에서 본격적으로 열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그중 첫 번째가 바로 블랙프라이데이. 추수 감사절 다음날인 11월 마지막 금요일을 뜻하는 이날엔 온갖 상점들이 일 년 치 재고를 싼값에 내놓고 사람들은 벼르고 있던 것들을 갖기 위해 몰려든단다. 미국의 생산/유통 시스템과 연말 소비 심리가 맞물려 만들어진 일종의 경제 현상이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소비자 입장에선 ‘폭탄세일 하는 날’ 일뿐이지. 그래서 이제는 블프가 전 세계적인 쇼핑 이벤트가 됐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고.
해외 직구로나 접했던 블랙프라이데이를 미국 그것도 뉴욕에서 맞는단 생각에 목요일 밤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백화점 문이 열리기 무섭게 사람들이 뛰어가는, 더러는 물건을 두고 주먹다짐하는 영상들을 봐왔던 터라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걱정만큼은 아니었지만 다음날 맨해튼의 메이시스 백화점 풍경은 과연 대단했다. 1층 전체는 물론이고 에스컬레이터까지 사람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에스컬레이터를 멈춰 놓았을 정도. 상점들도 이날만큼은 할인 상품들을 행거와 매대에 모두 꺼내두고 판매 중이었다. 쇼핑 욕구에 가득 찬 사람들이 그것들을 파헤친 잔해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것이 어릴 때 갔던 2001 아웃렛 풍경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나는 이날 빈손이었다. 원래도 백화점 쇼핑 타입은 아니었던 데다 무엇을 살지, 이게 얼마나 싼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망설일 수밖에. 게다가 코로나 기점으로 미국의 블프 문화도 바뀌었단다. 서울 여행 얘기로 대화를 튼 백화점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제 굳이 금요일의 전투를 벌일 필요 없이 프리-블프 세일과 온라인 주문, 현장 픽업 등으로 쇼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산 물건들 대부분 온라인이 더 저렴했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라디오에 고정 출연하던 당시 ‘꿈꾸라(꿈꾸는 라디오) 공식 패셔니스타’로 불린 적이 있다. 그만큼 평소 옷과 신발, 액세서리에 관심이 많은 걸로 주변 사람들에게 유명하단 얘기. 게다가 전자제품도 얼리어답터에 가까울 만큼 좋아한 나머지 IT 칼럼니스트 활동도 했었다. 그러니 뉴욕에서의 블프를 누구보다 기대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여행 중엔 잠시나마 ‘쇼핑 무용론자’가 된다. 이 좋은 풍경을, 멋진 도시를 감상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냐는, 몸에 좋은 것 두르는 것보다 더 많이 다니고 먹고 경험하는 것이 남는 거란 생각에 사로잡혀서. 물론 귀국과 동시에 다시 소비 괴수가 되긴 하지만 그때만큼은 진심이다. 일 년 전 10kg짜리 배낭 하나 메고 90일간 여행하는 동안에도 쇼핑이라곤 도시마나 하나씩 모은 핀 배지가 전부였다. 메고 지고 다닐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석 달 내내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도 뭐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즐거웠다.
근데 이런 나도 뉴욕에서는 쇼핑 무용론자로 사는 데 실패했으니 블프가, 미국이 대단하긴 한 것 같다. 연말 특가니까, 마침 필요했다고, 어차피 사게 될 거라면서 하나 둘 구입한 것들이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 귀국을 앞두고 26인치 트렁크를 사야 할 정도가 됐다. 옷과 신발, 모자, 스카프, 에어팟 등등. 돌아보니 이만큼 나를 위해 물건을 산 적이 없다. 핑계를 대자면 혼자서 한 끼에 4,5만 원이 우습게 나가는 밥값 하며 숙박비, 교통비와 비교하니 옷과 신발, 전자 제품이 너무 싸게 느껴지더라. 뉴욕 물가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볼 생각이다.
이만큼 산 적이, 이토록 쓴 적이 없어서 그렇지 어느 것 하나 이야기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 처음으로 산 폴로 랄프 로렌의 퀼팅 재킷은 유독 따뜻했던 작년 겨울 날씨에 대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한국 매장 가격의 반값이기도 했고 온라인 주문-현장 픽업이 자리 잡은 뉴욕 쇼핑 문화를 경험한 계기기도 했다. 같은 색깔의 장갑은 칼바람 불던 브루클린 다리에서 끝까지 노을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줬다. 타임 스퀘어에서 새해를 맞을 때도 함께 했다. 콧물과 추억으로 범벅된 장갑이다. 모마 디자인 스토어에서 산 파란색 뉴욕 메츠 모자는 장발로 멋없게 길어진 머리를 가려줬다. 몇 번의 긴 여행 이후 마니아가 된 뉴발란스의 새 스니커는 바람대로 다음 여행으로 나를 이끌었다. 뉴욕과 런던에만 매장이 있는 에임 레온 도르의 스카프는 처음으로 택배 주문한 물건이다. 택배 분실 사고가 많다는 얘기에 도착 예정일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루는 이걸 두른 날 “스카프가 예쁘네요.”라는 칭찬을 들었는데 입가로부터 퍼지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이 스카프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참 동안 풀어놓았다. 석 달 동안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 중 일부는 베스트 바이에서 산 삼성 SSD에 잘 담겨 있다. 오늘 아침에 퀼팅 재킷을 입으니 낡은 아파트에서 팬티 바람으로 기뻐하던 그날 생각이 나더라. 쇼핑 무용론자였던 과거의 내게 말 해 주고 싶다. 쇼핑도 꽤나 긴밀한 그리고 장황한 여행기가 될 수 있다고.
요 며칠 낮에는 한국 사이트, 밤에는 해외 사이트를 다니며 블프 특가를 찾고 있다. 벌써 일년이나 됐다 싶어 한편으론 빠르게 지난 시간에 대한, 다른 한편으론 작년 뉴욕 블프에 대한 아쉬움에 사무친다. 그때 좀 더 사 올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