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만의 온도, 그게 위로가 돼.
12월을 맞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이른 연말 모임이나 파티가 될 수도, 창문 옆에 놓은 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불을 밝히는 장면일 수도 있다. 거리의 조명 장식, 예상치 못한 선물 상자, 새로 산 빨간 스웨터와 양말을 보며 잠시나마 훈훈해지기도 한다. 이때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온기다.
웨스트 빌리지의 레스토랑 미네타 태번에서의 식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1950년대 뉴욕을 잠시 엿본 듯한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골든 라벨 버거의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 패티를 한 입 먹는 순간 뉴욕에서 들입다 햄버거만 파고 있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2주 전 예약해 둔 수고가 아깝지 않은 것은 물론 내가 방문한 60여 개 버거집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험이었다. 물론 가격도 손에 꼽을 만큼 지불해야 했지만. 계산 후 서버는 카드와 영수증 그리고 엽서 한 장을 건넸다. 종종 이렇게 엽서나 예쁜 클립을 준비한 식당이 있다. 따로 쓸 일이 없는데도 괜히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막대한 팁이 조금이나마 덜 아깝달까. 엽서를 뒤집어 보니 크리스마스 장식과 함께 적혀 있는 ‘Happy Holidays!!’라는 문구. 이제 막 뗀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고 잠시 앉아 그 말의 온기를 음미했다. 그해 12월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디라고 안 그러겠냐만 맨해튼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정말이지 화려하다. 오죽하면 이 사람들 지난 일 년간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지,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머지않아 나머지 열한 달 즐길거리들도 넘친다는 걸 알았지만. 사람들 모이는 곳들은 당연하고 작은 공원, 이름 모를 골목길, 유리창으로 슬쩍 내비치는 누군가의 거실과 방에 채워진 이 계절의 상징물들을 구경하는 것이 무척 즐거워서 12월 한 달은 정말 정말 많이 걸었다. 아파트가 있는 헬스 키친부터 월 스트리트까지 걸어서 두어 시간이 걸리고 기분 내키는 날 다리까지 건너면 한 시간쯤 더 걸린다. 그 긴 산보 중간중간 무슨무슨 크리스마스트리가, 어떤 건물의 조명 장식들이 있으니 그거 기웃대느라 나중엔 예닐곱 시간 걷는 게 우스워졌다. 덕분에 뉴욕의 연말을 궁금해하는, 여행을 앞둔 이들에게 가 볼 만한 곳들을 보여주고 일러줄 수 있게 됐고.
그때 이 노래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 전 김동률의 노래 ‘산책’을 종일 반복해서 들으며 했던 생각이다. 시끌벅적한 12월의 맨해튼에서 내내 혼자였던 나는 대체로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의지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이 즐겁지만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니까. 일이십 년은 된 노래들 아니면 시시콜콜한 농담들이 있는 팟캐스트였는데 향 못지않게 음악도 공간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는지 요즘도 같은 플레이리스트, 에피소드를 들으면 그때 걷던 길이나 보고 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편으론 새로운 노래에 어울리는 장소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동안 듣고 싶은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 한없이 흔하지만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이 시간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12월이다. 마음이 붕 뜬 나는 지난겨울의 기록을 들춰 보는 것을 택했고 다행히 제법 위로가 됐다. 근데 늘 주변에 ‘여행 다녀오겠다’고 했던 내가 왜 작년, 뉴욕만은 출장을 간다고 했을까. 그러게, 뭐가 달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