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다렸겠어요. 좋아하니까 그렇지.
하루 중 어느 때를 제일 좋아해?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대부분 “응?” 아니면 “네?”라 답했다. 그럴 만도 하다. 직전까지 오갔던 말과 상관없이 불쑥 던진 질문이었으니. 하지만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궁금해지면 당장 묻지 않곤 견딜 수가 없는 걸.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이걸 묻는 걸 좋아한다. 얼마나 좋은지 아끼고 아끼느라 소중한 이들에게만 조금씩 살살 뜯어 나눈다. 진심으로 당신의 시간 그리고 당신이 궁금해졌다는 의미다. 앞으로 아니면 오늘 하루라도 내 절친 또는 연인이 되어 달란 뜻이다.
같은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시기마다 달랐다. 학생 때야 당연히 수업이 끝나는 늦은 오후였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엔 출근하자마자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끝없는 우울에 빠졌던 시절엔 잠 못 이루는 밤을 미워하고 원망하다 결국엔 사랑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좋아한 적은 없다. 누군가의 가슴팍에서 이대로 밤이 영원하길 바랐던 적은 있어도.
요즘은 노을 질 무렵이 좋다. 파랑에서 시작해 검정으로 끝날 때까지 시시각각 하늘에 번지는 노랑-주황-빨강-자주-보라색 그러데이션이, 뺨부터 귀밑을 연신 간질이는 바람이 좋다. 모인 사람들의 소란도, 모든 생명이 숨 죽인 듯한 정적도 어느 쪽이든 좋다. 그 시간 동안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 여행은 낯선 땅 위로 퍼지는 노을을 찾아다니는 일종의 사냥이 됐다. 오전, 오후가 노을 볼 곳을 고르고 이동하기 위해 존재하는 날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이번엔 며칠 다녀오셨어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도 있다. “가만있어 보자, 노을을 열 번 봤으니 10박 11일이네요. 아니다 하루는 비행기에 있었으니 10박 12 일구나.”
90일간의 유럽 배낭여행 중 포르투갈의 포르투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도 노을이다. 동틀 무렵 도착한 나는 동 루이스 대교와 그 주변으로 옹기종기 늘어 선 건물들,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도오루 강의 다채로움에 매료됐고 이후로 매일 주변 노을 스폿을 찾아다녔다. 오늘은 강 건너 빌라 노바 드 가이아의 모로 공원에서, 내일은 포르투의 낡은 주차장 난간에 앉아서 노을을 기다렸다. 나타(에그 타르트)에 커피 가 들고 간 날이 있었는가 하면, 작은 포트 와인 한 병 홀짝이며 감상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하루가 마무리되는 아쉬운 시간이었겠지만 내게는 그날의 클라이맥스였다.
볼 것도 할 것도 많은, 그래서 80일도 터무니없이 짧았던 뉴욕에서도 해 지는 것을 원망한 날보단 기다린 날이 더 많았다. 물론 모두가 바람 같진 않았다. 길게는 보름 가까이 노을은 고사하고 해 한 번 안 비칠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다 펼쳐진 황홀경이 그간의 아쉬움을 잊게 했다. 더 많은 곳에서 노을을 보고 싶게끔 만들었다. 내일은 저기로, 다음날은 거기서.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맨해튼 브리지 그리고 브루클린 브리지. 두 개의 다리 위에서 노을을 보는 시간 그리고 눈과 가슴, 사진으로 남은 장면들이 내 뉴욕 기록집의 맨 앞장과 뒷장을 차지한다. 날씨 화창한 날엔 어김없이 발걸음이 이스트 강변으로 향할 만큼 그곳을 정말 좋아했다. 붉은 노을이 절정에 달할 호응 하듯 어떤 때는 경쟁하듯 불을 밝히는 맨해튼 빌딩숲의 조명들이 이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을 만든다.
재미있는 건 여행 초반에는 주로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맨해튼 브리지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 돌아보니 여행 그리고 낯선 도시에 대한 설렘이 가시기 전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 또 실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느 뉴욕 사진 속 장면에 나를 가져다 뒀을 게다. 이후로 눈앞 풍경들에 시큰둥해지고 심박수도 잦아들면서 몇 발짝 떨어져 감상할 여유가 생긴 거겠지. 숙소도 맨해튼 한복판에서 강 너머 브루클린 조용한 동네로 멀어졌으니까. 둘 중 어느 쪽이 좋았냐 물으면 후자다. 여행 그리고 삶에서도 나는 관조하는 쪽이기에.
빽빽한 맨해튼 시내는 도무지 내 몸 하나 둘 곳 없어 보이지만 몇 블록만 더 가면 어디에든 앉고 드러누울 수 있는 센트럴 파크가 있다. 커다란 돌 언덕에서 그나마 평평한 바닥을 찾는다. 다음으론 시야가 트여 있는지 확인한다.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 자리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렇게 자리 잡고 앉아 노을을 맞이하고 감상하다 떠나보내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눈은 하늘, 도시를 향해 있어도 머리는 온갖 잡념에 빠져든다. 처음엔 내려 두고 온 일상, 돌아가면 맞닥뜨려야 할 일에 관한 것이었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 마침내 망상 속을 날아다니기 일쑤다. 언제가 될지 모를 이탈리아 일주와 젤라토 투어 계획, 뉴욕 사진 전시에 모일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 똥꼬에 힘을 주면 하늘을 날 수 있는 슈퍼 히어로 스토리 같은 것들. 공원에서의 노을은 그런 것들이 즐거웠다. 그렇다고 풍경이 다른 곳보다 못했단 얘기는 아니다. 센트럴 파크엔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빌딩 숲의 낭만이, 도미노 파크엔 강 너머 맨해튼 야경을 보며 느낀 새삼스런 설렘이 있었다. 선셋 파크에선 언젠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쥐고 걷는 상상을 했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전망대에 올라 감상하는 노을은 확실히 더욱 드라마틱하다. 얼마 전까지 꿈만 꾸던 도시가 발아래 앞뒤좌우로 펼쳐진 것만으로도 황송한데 노랗고 빨갛게 물까지 들어 버리면 이게 과연 현실인가 싶다. 뉴욕 최고의 전망대들 중 두 곳, 탑 오브 더 락과 엣지에서 본 노을도 잊을 수 없다. 날씨 운 없는 중에도 노을 복은 있었던지 그 겨울 최고의 황홀경이 벌어졌을 때마다 나는 평소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1월 2일이었던가, 며칠 만에 벌어진 잿빛 구름 틈새로 쏟아지는 빛을 본 순간 떠오른 단어는 오늘 그리고 노을이었다. 곧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찾아 펜 역으로 갔다. 허드슨 야드에 있는 100층 전망대 엣지에서 덜컥 일년짜리 패스를 샀다. 귀국이 고작 한 달 남았는데 말이다. 1회 관람에 40달러인데 일년 치 자유 이용권이 99달러니 세 번만 가도 이득이란 계산. 실제로 한 달간 매주, 총 다섯 번 전망대에 갔다. 그날처럼 노을이 멋진 것 같은 날에 다시 갔고 한낮의 시내 전경이 궁금할 때도 갔다. 눈이 왔으니 한 번, 딱히 할 게 없어서 또 한 번. 귀국 전날 마지막 밤도 엣지에서 보냈다. 야무지게도 썼지.
그렇게 많이 찾아다녔어도, 기다릴 만큼 기다려 봤어도 노을은 도무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종일 햇살 눈 부시던 날에도 별 이벤트 없이 암막만 툭 떨어진 날이 있었는가 하면, 도통 해 한 번 비치지 않다가 한순간 구름 걷히고 온 도시가 붉게 물든 적도 있다. 그럴 때면 당장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근데 지나 보면 그게 내 사랑을 더 짙게 만든 것도 같다. 맘 같지 않아서 더 열망하고, 애가 탔던 만큼 더 쉬이 녹았을 테니. 여행의 추억도 계획을 벗어나는 순간 더 짙어지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자구만 끌리지 않던가. 내가 좋아하는 때는 이런 순간들인가 보다.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다행히 많은 해프닝이 필요해서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서울 일몰은 언제더라.